면시(面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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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명씩 면대하여 시험하는 것.

개설

면시는 중국의 당나라와 송나라 때 행하던 제도였다. 실력이 부족한 사람이 부정적인 방법으로 과거에 합격하는 사례가 늘어나자 해결 방안으로 면시 실시가 제안되었다. 합격자가 확정된 이후에 직접 면대하여 실력을 확인한 후에 최종 급제를 내리는 것으로 영조대에 잠시 실시되었으나 제도로 확립되지는 않았다.

내용 및 특징

면시는 부적격한 사람이 합격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과거의 공정성과 관련되었다. 면시가 거론된 것은 영조 때이다. 1744년(영조 20) 가을 정시(庭試)에서 방방(放榜)한 다음 날 어전에서 면시하여 과거에서 요행을 바라지 못하게 하자는 주장이 있었다(『영조실록』 20년 7월 25일). 과거 시험장에 다른 사람이 대신 들어오거나 한 사람이 지은 글을 10명이 옮겨 쓰는 등 실력이 안 되는 사람이 부정한 방법으로 합격을 하는 등 과거의 운영이 엄밀하지 못하는 일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전시(殿試)나 정시(庭試)에서 면시를 하여 가려내도록 하는 법을 정하자는 요청이 있었지만(『영조실록』 25년 11월 5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756년(영조 32)에 이르러 영조는 면시 시행에 동의하였으나(『영조실록』 32년 5월 16일), 실제로 면시를 실시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 것은 1763년 이후였다. 1763년(영조 39) 증광문과에서부터 왕이 입격한 사람들을 면시하였다(『영조실록』 39년 10월 19일)[『영조실록』 12월 10일 3번째기사]. 이듬해 1764년에도 면시를 실시해 급제를 내렸는데(『영조실록』 40년 1월 8일) 당시까지도 면시는 경우에 따라 행하기도 하고 행하지 않기도 하였다(『영조실록』 40년 2월 10일).

면시도 엄밀하게 하지 않으면 폐단이 있게 마련이었다. 강경의 규식에 따르면 연소하여 강을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문장에 능한 것이 아니며 연로하여 문장에는 능하다고 해도 강에 능한 것이 아니어서 면시가 인재를 취하는 좋은 방법이기는 하나 영조가 차마 박절하게 금하지 못하여 한두 번 시행하고 말았다는 기록으로 보아(『영조실록』 40년 7월 25일), 면시 제도는 아직 정착되지 않았으며 상당히 신중하게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

면시를 급제가 아니라 승진을 위해서 적용한 사례가 있었다. 1775년(영조 51) 승문원참하(參下)의 관리 3명을 면시를 통하여 뽑았는데, 수석을 차지한 이수함(李壽咸)을 정7품 이하의 관직을 종6품 이상의 관직으로 올려 승륙(陞六)시켜 승진의 특전을 내렸다(『영조실록』 51년 11월 19일).

면시는 복시에서 방을 내건 다음 참방한 사람을 궁전 뜰에 모아 놓고 하는데 사실 왕이 직접 참석하는 전시(殿試)와 다를 바 없었다(『정조실록』 1년 9월 22일). 정조 즉위 후 과거의 폐단을 개선하는 방안으로 면시가 거론되었는데 정조는 전시나 면시나 같다고 생각하여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었다. 정조는 면시 규정이 없는 생원진사시에 응시자 중 약간 명을 뽑아 면시를 해 보는 것에 대하여 여론을 묻기도 하였다(『정조실록』 12년 10월 15일).

순조 연간에 와서도 면시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1809년(순조 9) 면시 실시에 대한 요청이 있자 면시를 갑자기 행할 수 없다고 하여 실시하지 않았다(『순조실록』 9년 10월 24일). 1827년에도 재산이 많고 무식한 무리들이 부정 합격하고 빈한한 집안의 재주 있는 선비들이 낙방하는 폐단을 해소하기 위하여 초시 출방 때 면시를 보아 복시에 응시하게 하자는 건의가 있었지만, 면시는 급작스럽게 할 수 없는 일이라 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순조실록』 27년 3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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