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지대(孟至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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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30년(영조 6)∼졸년 미상.] 조선 후기 영조~정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병조 참의(參議)⋅승지(承旨)이다. 자(字)는 양여(養汝)이다. 본관은 신창(新昌)이고, 거주지는 충청도 온양(溫陽)이다. 아버지는 내시 교관(敎官) 맹숙주(孟淑周)이고, 어머니 심씨(沈氏)는 심한규(沈漢規)의 딸이다. 과암(果菴) 송덕상(宋德相: 송시열의 현손)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충청도 감사(監司)맹만택(孟萬澤)의 손자이고, 사간원 정언(正言)맹양대(孟養大)의 형이다. 정파는 노론(老論)의 벽파(僻派)에 속하였다.

영조 시대 활동

1752년(영조 28) 사학 유생(四學儒生)들을 이끌고 나라에 상소하여, 노론(老論)의 영수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배향할 것을 청하였는데, 맹지대(孟至大)가 그 상소의 소두(疏頭)가 되었다. 당시 대리청정(代理聽政)하던 세자(世子: 사도세자)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773년(영조 49) 증광(增廣)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44세였다.[<문과방목>] 영조 때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쳤는데, 지방의 수령관을 주로 역임하였다.

정조 시대 활동

1781년(정조 5) 김천찰방(金泉察訪)으로 있다가, 1783년(정조 7)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고, 홍문관 수찬(修撰)을 거쳐,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

1784년(정조 8) 홍문록(弘文錄)을 선록(選錄)할 때, 노론의 대신들에 의하여 권점(圈點) 4점을 받아서 22명 가운데 들어갔다. 이때부터 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치게 되었는데,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부교리(副校理)로 승진하였고,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그해 윤3월에 노론의 벽파가 역적으로 몰려서 축출 당하였는데, 사간원에서 노론의 벽파 영수인 송덕상(宋德相: 송시열의 현손)의 제자라고 하여 탄핵하였으나, 정조가 말하기를, “맹지대를 곧바로 역적의 잔당으로 내몰고 있는데, 이게 과연 말이나 되는가.”하고 비호하였다. 그해 6월에 『홍문관지(弘文館志)』와 『규장각지(奎章閣志)』가 완성되자, 정조가 그 편찬에 참여한 맹지대에게 시상(施賞)하였다.

1785년(정조 9)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가, 다시 홍문관 수찬이 되었는데,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1786년(정조 10) 다시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가, 부사과(副司果)를 거쳐,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 그해 윤7월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으나, 승지로서 신하들의 상소(上疏)와 차자(箚刺)를 왕에게 제대로 봉납(奉納)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파직되었다.[『일성록(日省錄)』 정조 10년 9월 26일]

1787년(정조 11) 강릉부사(江陵府使)로 나가서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1789년(정조 13) 다시 승지로 발탁되어, 정조의 측근이 되었고, 1790년(정조 14) 분승지(分承旨)가 되었다가, 1791년(정조 15) 병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었다. 궁궐을 숙직(宿直)할 때 병을 핑계되고 멋대로 직소(直所)를 떠났다가, 정조의 노여움을 사서, 충청도 서천군(舒川郡)의 바닷가에 유배되었다.

1792년(정조 16) 정조가 유배에서 풀어주고, 함경도 종성부사(鍾城府使)에 임명하였으나, 맹지대는 종성이 극변(極邊) 지방이라고 하여 병을 핑계대고 부임하지 않았다. 이에 정조가 대노하여 맹지대를 함경도 종성(鍾城)으로 유배하였다.

1793년(정조 17) 나라에서 죄인들을 사면(赦免)할 때 종성에 유배된 맹지대도 석방하였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호방하고 솔직하여, 가끔 거리낌 없이 말하고 행동하다가 주변의 오해를 받았다.

정조가 군사 훈련을 감독 시찰하려고 하여, 병조 참의맹지대에게 군사들의 비밀 군호(軍號)를 의논해서 보고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병조 당상관(堂上官)맹지대가 보고한 군호(軍號) 가운데에 ‘그리마[蚰蜒: 지네와 같은 곤충]’라는 칭호가 있었으므로, 정조가 상을 찡그리며 다른 칭호로 고쳐서 다시 보고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맹지대가 다른 사람에게 불평하기를, “옛날에도 이것으로 군령을 삼은 적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정조가 그 말을 듣고 화를 내기를, “나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옛날에 있었다.’고 하여 모두 쓸 수 있다면 ‘계륵(鷄肋)’이라는 말도 군호로 삼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하였다.[『홍재전서(弘齋全書)』 권162]

부인과 후손

부인 김씨(金氏)는 김엽(金燁)의 딸이다. 장남은 맹심원(孟心遠)이고, 차남은 맹성원(孟性遠)이다.[족보]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일성록(日省錄)』[정조]
  • 『국조방목(國朝榜目)』
  • 『녹문집(鹿門集)』
  • 『퇴헌유고(退軒遺稿)』
  • 『홍재전서(弘齋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