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가퇴(亡可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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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태조누르하치의 5번째 아들인 아이신 기오로[aisin gioro, 愛新覺羅] 망굴타이[manggūltai, 莽古爾泰]의 한자 이름.

개설

망굴타이([莽古爾泰], manggūltai)는 일찍이 울라([烏拉], ula) 정벌에 종군하여 용맹을 드러냈고, 1616년 4월에 호쇼이 버일러([和碩貝勒], hošoi beile)에 봉해졌다. 정남기(正藍旗)의 기주(旗主)였다. 1619년 심하 전투(사르후[薩爾滸] 전투)에 참가하여 우선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를 따라 명군 총병두송(杜松)이 이끄는 군사를 공격하였고 다시 남하하여 또 다른 명군 총병유정(劉綎)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후금의 명과 몽골에 대한 공격에서 적지 않은 전공을 세웠다. 홍타이지([皇太極], hongtaiji), 다이샨([代善], daišan), 아민([阿敏], amin)과 더불어 4대 버일러([四大貝勒], duin amba beile)의 하나였다.

가계

망굴타이는 누르하치와 푸차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더걸러이([德格類], degelei)의 동복형이자, 망구지([莽古吉], manggūji)의 동복오빠였다. 어머니인 푸차씨는 이복형인 다이샨과 정분이 났다는 혐의를 받았는데, 망굴타이는 누르하치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모를 직접 죽이게 된다. 망굴타이는 7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그의 사후 역률에 저촉되어 그의 후손들이 종실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만큼, 부인과 후손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 없다.

활동 사항

망굴타이는 1612년 누르하치를 따라 울라부 정벌에 참가하였다. 울라의 버일러 부잔타이([布占泰], bujantai)가 전장에서 이탈하자 망굴타이는 강을 건너 추격할 것을 아버지 누르하치에게 제안하였으나, 적의 근거지를 곧장 공격하지 말고 인근의 성보들을 공략할 것을 지시를 받았다. 이때 망굴타이는 울라의 성 6개를 함락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1616년 4월 망굴타이는 누르하치로부터 호쇼이 버일러로 봉해졌고, 4명의 대버일러([大貝勒], amba beile) 가운데 나이가 3번째였으므로 일란치 버일러([三貝勒], ilanci beile)라고 하였다.

1619년에 심하전투(사르후전투)에 참가하여 두송과 유정의 군사를 격파하였고 그해 8월에는 여허([葉赫], yehe) 공격에 참가하였다. 이 시기에 망굴타이는 친모 푸차씨의 문제로 이복형 다이샨과 문제가 있었는데, 조선에는 홍타이지에 대한 시기로 인해 발생한 사건이라고 알려지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 13년 9월 10일).

1620년 누르하치가 명을 공격할 때에도 종군하여 전공을 세웠다. 1621년 진강을 지키던 장수 진량책(陳良策)이 배반하였다가 모문룡(毛文龍)의 휘하로 들어가자 망굴타이는 다이샨과 함께 금주(金州)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복주(復州)로 이주시키기도 하였다. 1625년 망굴타이는 군사를 거느리고 여순(旅順)을 공격하였고, 같은 해 몽고(몽골) 차하르[cahar, 察哈爾] 부의 릭단([林丹], Ligdan) 칸이 코르친([科爾沁], korcin) 부를 공격하자 구원하기도 하였다. 1625년 누르하치가 군대를 이끌고 칼카([喀爾喀], kalka) 몽골의 바린([巴林], barin) 부를 공격할 때 먼저 가서 전투를 벌였고 셀 수 없을 만큼의 노획물을 확보하기도 하였다. 망굴타이는 1627년부터 1629년에 이르기까지 명과의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공로가 있었고, 1630년에는 영평(永平)과 준화(遵化)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1631년 망굴타이는 대릉하(大凌河) 공격에 참가하여 친동생 더걸러이([德格類], degelei)와 함께 자신에게 속한 정남기를 거느리고 성의 남쪽을 포위 공격하였고, 명의 구원군을 격파하여 감군장춘(張春) 등을 사로잡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그러나 이때 명에 대한 공격에서 홍타이지와 의견이 대립하여 술에 취한 채 칼을 뽑아드는 등의 행동으로 분노를 샀다. 또 이전에 죄를 지은 자신의 어머니인 푸차씨를 직접 죽였던 일로 인하여 여러 버일러들로부터 불경죄로 탄핵되었다. 이로 인하여 망굴타이는 호쇼이 버일러의 작위를 빼앗겨 도로이 버일러([多羅貝勒], doroi beile)로 강등되었고, 자신의 니루([牛彔], niru) 5개를 빼앗겼으며 벌로 10,000냥의 은 등을 내는 입장에 처하였다.

1632년 후금이 몽골 차하르 부를 공격하다가 릭단 칸이 도주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자 명으로 공격 대상을 바꾸었다. 망굴타이는 이때 명의 대동(大同)과 선부(宣府)를 기습하여 탈취하는 공을 세웠다. 그해 12월 망굴타이는 병에 걸려 사망하였다.

상훈 및 추모

1635년 홍타이지는 망굴타이가 ‘대금국황제지인(大金國皇帝之印)’이 새겨진 인장을 가졌던 것을 찾아내고 또 그가 친동생 더걸러이 등과 역모를 꾀하였다고 하여 사후에 처벌을 내렸다. 망굴타이는 모든 관작과 명예를 추탈당하고 그의 후손들은 종실로서의 자격을 모두 상실하였다. 그가 거느렸던 정남기는 정황기(正黃旗)와 양황기(鑲黃旗)에 분급되어 팔기(八旗)는 일시적으로 칠기(七旗)로 바뀌었다가 곧 회복하였다.

참고문헌

  • 『만문노당(滿文老檔)』
  • 『청사고(淸史稿)』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만주학센터, 『만주실록 역주』, 소명출판, 2014.
  • Arthur W. Hummel, Eminent Chinese of the Ch'ing Period(1644~1912), Ch’eng Wen Publishing Company, 1972.
  • 蘇亮, 「阿敏、莽古爾泰事件與皇太極改造八旗」, 『牡丹江師範學院學報』, 2007年 2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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