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의사(萬義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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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화성군 동탄면무봉산에 있는 절.

개설

만의사(萬義寺)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고, 고려후기에는 천태종의 제8세 혼기(混其)가 법화도량(法華道場)을 연 뒤부터 천태종 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조선시대에는 대표적인 문신이자 유학자였던 송시열(宋時烈)이 왕실의 장례 때 상복을 입는 기간을 두고 남인(南人) 세력과 논쟁을 벌일 때 머물렀던 절이다.

내용 및 특징

(1) 고려시대

만의사는 고려후기에 천태종 중심 사찰이었다. 1392년(태조 1) 권근(權近)이 지은 「수원만의사축상화엄법회중목기(水原萬義寺祝上華嚴法會衆目記)」에 만의사의 연혁이 수록되어 있다. 이 글에 의하면 만의사는 예로부터 국운의 흥성과 태평성대를 도와서 보완하기 위해 기도했던 비보사찰(裨補寺刹)이라고 한다. 그런데 고려후기 천태종의 혼기가 무너진 지 오래되어 가시덤불로 덮인 옛터에 절을 중건하였다. 고려 우왕(禑王)대부터는 천태종과 조계종에서 교대로 주지를 맡게 되면서 토지와 노비를 둘러싸고 경제적 이권 다툼이 노골화되어, 결국 조계종으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그러자 천태종에서는 법에 호소하기에 이르고, 관에서는 만의사 소속 노비를 약간만 남기고 모두 수원부(水原府)로 귀속시켜 버렸으며, 절의 소유권은 원래대로 천태종에 되돌려 주었다.

1390년(고려 공양왕 2)에는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에 공이 컸던 신조(神照)가 절의 주지가 되면서 사회적 보장과 경제적 기반을 굳혀갔다. 신조는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궁중에 자유로이 출입하면서 왕실과 국가의 복을 비는 대법회를 주관하기도 한 인물이다. 그는 이성계를 지지하면서 사냥이나 전장(戰場)에 항상 따라다녔는데, 자신은 고기를 먹지 않았지만, 태조에게 음식을 드릴 때마다 직접 고기를 베어서 요리했다고 한다. 당시 이성계는 신조에게 공신패(功臣牌)를 내리고, 만의사에 소속된 노비를 영구히 그의 제자들에게 전하도록 하였으며, 전지 70결을 주어 불공 비용으로 쓰도록 하였다.

(2) 조선시대

1392년(태조 1)에는 왕의 장수와 국가의 복을 기원하기 위해 천태종의 덕 높은 승려 330인과 380명의 승려를 초청하여 21일 동안 화엄법회(華嚴法會)를 열기도 하였다. 조선 건국 후 신조는 봉리군(奉利君)에 봉해지기도 했다.

만의사는 서산 대사 휴정(休靜)이 수도한 사찰이며, 사명 대사 유정(惟政)의 제자 선화(禪華)도 이곳에 머물다가 1644년(인조 22)에 입적하였다. 1796년(정조 20) 수원 화성을 쌓을 때 만의사의 동종을 가져다가 팔달문(八達門)에 옮겨 달았다.

조선후기에는 송시열이 만의사에서 머물기도 하였다. 송시열은 이 절에 머물며 1674년(현종 15) 예송논쟁(禮訟論爭) 당시 그의 기년설(朞年說)을 옹호했다가 숙종 초부터 사이가 벌어진 문신이자 학자였던 이유태(李惟泰)와 서신을 왕래하였다(『숙종실록』 6년 5월 12일). 아울러 송시열이 죽고 난 후 그의 묘를 옮기는 이장지(移葬地)로 선정되면서 만의사(萬儀寺)라 개칭되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양촌집(陽村集)』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김영태, 『한국불교사』, 경서원, 2008.
  • 윤기엽, 『고려후기의 불교』, 일조각, 2012.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일조각, 1993.
  • 황인규, 「趙仁規家門과 水原 萬義寺」, 『수원문화사연구』2, 수원문화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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