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송원(萬松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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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강호시대 대마번의 초대 번주인 종의지의 원당.

개설

원래는 송음사(松音寺)라고 불렀다가 이후 종의지의 법명인 만송원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1647년에 산기슭인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가람과 탑 등을 재정비하여 이후 대마도주인 종씨(宗氏)의 원당(願堂)이 되었으며 종씨의 묘역이 있었다.

만송원의 본당에 있는 본존불은 11면 관음으로 그 내부에 역대 번주의 위패가 나란히 있었다. 그리고 1645년에 권현당(權現堂)과 어영당(御影堂)에 모신 역대 장군의 위패들을 명치유신(明治維新)으로 동조궁(東照宮)이 폐지되면서 옮겨 왔다. 별실에는 덕천가강(德川家康)의 초상화와 역대 장군의 위패가 안치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대마도종씨의 19대 당주이자 대마번의 초대 번주였던 종의지가 1615년 정월 3일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종의성(宗義成)이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변천

1647년에 산기슭인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가람과 탑 등을 재정비하여 이후 대마도주인 종씨의 원당이 되었다. 1635년 덕천장군가(德川將軍家)를 모방하여 임제종(臨濟宗)에서 천태종(天台宗)으로 바꾸었으며, 1691년과 1726년에 두 번의 화재로 소실되어 본당 이외는 재건되지 않았다.

본당 안에는 청동으로 제작된 제사용 삼구족(三具足)이 있었다. 이것은 조선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학과 거북이가 장식된 촛대, 향로와 꽃병 세트였다. 원래는 3세트였던 것을 전쟁 중에 2세트가 공출되어 현재는 1세트만 남아 있다.

묘역은 상·중·하의 3단으로 되어 있는데 상단은 종의지를 비롯하여 역대 번주 및 정실부인, 중단은 측실 및 자녀, 하단은 일족 및 종가(宗家)에서 나온 사람들의 묘소였다. 상단부의 정면에 있는 종의성(宗義成)과 2대 번주 종의진(宗義眞)의 묘소가 특별히 큰 것은 이즈음 조일무역이 대단히 성하였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만송원은 대마도에 문위행이 파견되었을 때에는 다례가 열린 곳이기도 하며, 조선 정부는 1615년 도주 종의지가 사망하자 그의 조일 간의 교섭에 협력한 공적을 인정하여 1622년 조선에서 도서를 지급하였다. 도서를 소지한 만송원송사(萬松院送使) 제1선이 1625년 5월에 조선에 건너왔다. 만송원송사는 대마도에서 조선에 파견한 연례송사(年例送使)의 하나로 그 접대 기준이 유방원송사(流芳院送使)와 같았다(『인조실록』 7년 5월 8일).

조선 조정이 만송원에 도서를 제작하여 지급한 것은 종의지의 제사와 만송원의 운영비용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의 3대 묘지, 즉 만송원 외에 석천현(石川縣) 금택(金澤)의 전전가(前田家) 묘지, 산구현(山口縣) 추시(萩市)의 모리가(毛利家) 묘지 중의 하나로 국가지정사적이었다.

참고문헌

  • 『통문관지(通文館志)』
  •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 田代和生, 『日朝通交貿易史の硏究』, 創文社, 1981.
  • 永留久惠, 『對馬』, 杉屋書店,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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