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麻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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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의 서교 남쪽의 한강변에 있던 포구.

개설

조선시대에 한강(漢江)은 크게 삼강(三江)에 포함되어 있었다. 삼강은 한강·용산강(龍山江)·서강(西江)을 말하며, 한양 도성의 남쪽을 흐르는 강의 구간을 나누어 부르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세분해서 보면 남산 남쪽 일대 노량(鷺梁)까지를 한강, 노량에서 서쪽의 마포(麻浦)까지를 용산강, 마포에서 서쪽의 양화도(楊花渡)까지를 서강이라고 하였다. 마포는 삼강 가운데에 위치하면서 노량진과 양화진 및 용산과 서강 등의 포구들과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었다. 도성에서는 돈의문을 지나 서교의 만리현(萬里峴), 공덕촌(孔德村)을 지나는 도로가 이어졌다. 영조대인 1752년(영조 28)부터는 양화진의 별장이 마포 인근에 항행하는 선박들을 관리하도록 했다.

조선초기에는 왕이 행행하여 신형 군선의 제작과 수군 훈련이 이루어지던 군사 교련장의 역할을 하였다(『세종실록』 27년 9월 22일). 문종대에는 중국식의 군선 제작을 포기하고 한반도 연안의 조류(潮流)에 적응할 수 있는 갑조선(甲造船) 제작법을 적용한 군선 제작소가 있었다(『문종실록』 1년 5월 25일). 세조대에는 각종 화포의 발사가 이루어지던 군사 교련장의 역할도 하였다(『세조실록』 5년 9월 27일). 이처럼 마포는 육로와 수로의 요지에 있으면서 유통의 중심지는 물론 군사 기지로서도 활약하던 곳이다.

자연 환경

전면에 여의도가 있어서 한강의 유속(流速)이 느려지는 곳이므로 배를 정박하기에 유리한 포구가 자리할 수 있었다. 또한 한강의 하구에 인접하여 수심이 깊어 세곡선(稅穀船)과 같은 대형 선박이 접근할 수 있었다.

형성 및 변천

한강 연변에 위치하여 조선초기부터 별장과 정자들이 세워졌다. 세조대에는 양녕대군의 정자가 세워졌는데, 세조가 그 정자의 이름을 영복정(榮福亭)이라고 하였다. 영복정은 한평생을 영화롭게 살며 한평생 복을 누리라는 의미이다(『세조실록』 5년 6월 1일).

연산군대에는 왕의 유흥을 위해 마포 일대를 재정비하였다. 월산대군의 별장인 망원정(望遠亭)이 양화도 동쪽에 있었다. 연산군이 이것을 헐어서 다시 짓고 백초(白草)로 이었는데, 수천명이 앉을 수 있었다. 정자에 올라 바라볼 수 있는 곳은 공사를 막론하고 건물을 모두 헐어서 양화에서 마포까지 모두 빈터가 되었다(『연산군일기』 12년 8월 2일).

조선후기에는 한성부의 주도하에 계(契)를 조직하여 집집마다 1년에 3전씩 걷어 상호 부조에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마포 등의 포구에서 나오는 장세나 유통 물화에서 발생하는 이윤으로 인해 도성 내의 각 군문에서도 점포를 두어 이윤을 취하기도 하였다(『숙종실록』 9년 1월 18일).

마포에 들어오던 선박들에 따라 지역 이권이 발생하기도 하였는데, 청석어선(靑石魚船)의 사례를 들 수 있다. 어선이 각 포구에 정박하는 것은 각기 그 주인(主人)에 따라 정해져서 본래 일정한 처소가 없었으나 마포에는 여객주인(旅客主人)이 모두 있었다. 그런데 점차 한강의 각 포구로 흩어져 청석어선도 그 주인을 따라 마포에 집합하지 않았다. 여객주인의 역(役)을 헐값에 마구 판 것이 한 배경이었다. 마포에서 이윤 확보를 위해 여객주인권을 재차 확보하려고 빼앗아 이곳을 독차지하려고도 하였다. 이처럼 시기에 따라 마포의 주인권을 좌우하는 집단이 바뀌었다. 이외에 마포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건국 초부터 염전(鹽廛)과 혜전(醯廛)을 운영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성균관 인근에 거주하던 반인(伴人)들이 그 권리를 강제로 매입했는데, 1782년(정조 6)에 다시 돌려주라는 조치가 취해졌다. 또한 세곡선이 정박하는 곳이었으므로 미전(米廛)이 있었다. 그런데 용산보다 쌀값이 저가여서 그 시세차를 노린 영업 행위가 빈번하였다.

마포는 개항으로 외국과 수교한 이후에는 각국의 범선들이 정박하거나 사신들이 묵던 외교 장소로 변화하였다. 정부에서는 관원을 파견하여 외국 선박들을 감시하였으며(『고종실록』 25년 12월 10일), 방판(幇判)을 파견하여 세금을 납부하지 않는 것을 조사하기도 하였다(『고종실록』 31년 8월 7일). 1890년(고종 27)에는 청국에서 파견한 칙사들이 마포의 세심정(洗心亭)에 숙소를 정했다(『고종실록』 27년 9월 19일).

위치 비정

왼쪽에 용산, 오른쪽에 서강이 위치하였다.

관련 기록

『토정비결』을 쓴 이지함(李之菡)은 마포 항구에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든 다음 그 아래에 굴을 만들고 위에는 정사(亭舍)를 지어 자호를 토정(土鼎)이라고 하였다. 토정을 지은 뒤에 비록 홍수가 나고 큰물이 지나가더라도 흙 언덕은 완연하게 그대로 남아 있었다(『선조수정실록』 11년 7월 1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한경지략(漢京識略)』
  • 나각순, 『서울의 성곽』,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4.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하천』,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0.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지명사전』,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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