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日俄開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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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러시아와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한 주도권과 만주의 이권을 놓고 한반도 인근에서 벌인 전쟁.

개설

1896년(고종 33)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한 것을 전후하여 러시아와 일본은 대한제국과 만주에 대한 이권 및 주도권 장악을 놓고 각축을 벌였다. 양국은 청일전쟁 이후 삼국간섭, 명성황후 시해에 따른 을미사변 및 아관파천 등의 사건 때마다 대립·갈등하였다. 1897년 대한제국의 성립 직후 러시아의 여순항 점거, 1900년 6월 의화단 사건에 따른 러시아의 만주 점령 등은 러시아와 일본이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전쟁을 통해 갈등을 해결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배경이 되었다.

1902년에 일본은 영일동맹을 성립시킴으로써 러시아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고 전쟁으로 러시아를 동북아시아에서 제압하려는 구상을 하게 되었다. 러시아도 1903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극동총독부를 신설하면서 대외정책을 주도하던 재상인 비테를 비롯한 관료들을 해임하고 황제파를 전면에 내세웠다. 또한 러시아는 1900년 이후 만주에 주둔하던 군대를 철수한다는 만주환부조약(滿州還付條約)를 무시하고 1903년 병력을 증강하여 군사적 긴장을 증대시켰다. 결국 양국은 외교적 조정과 해결을 찾는 실마리를 모두 봉쇄하고 전쟁으로 향하였다.

이런 동북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에도 대한제국은 내부적으로 친러·친일파의 각축이 벌어져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특히 전쟁터의 주요 당사국이면서도 러시아와 일본의 일방적인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국력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반면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뒤이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내정을 간섭하는 통감부를 신설하여 대한제국을 식민화하려는 의도를 전면적으로 드러내었다.

역사적 배경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였으나 러시아의 외교적 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반환하고 대한제국을 독점하려던 계획이 저지되었다.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고종과 명성황후가 친러적 경향을 보이다가 명성황후가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살해되는 을미사변이 발생하여 반일 정서가 강해졌다. 특히 1896년 2월 친러파에 의해 고종의 아관파천이 거행되자 한반도 내에서 일본은 러시아와 첨예한 이권 쟁탈에 돌입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경의선 철도와 압록강 및 울릉도 연안의 삼림 개발, 마산포와 월미도 조차 등은 양국의 정치·군사·경제적 이권이 충돌하는 사안이었다. 양국은 만주와 한반도의 경영 및 영토 확보를 위해 만한교환론(滿韓交換論) 등의 외교적 대안을 논의했으나 일본이 영국 등의 국제적 지원을 배경으로 개전으로 나아가 결국 1904년(광무 8) 2월 러시아를 선제공격하면서 전쟁이 개시되었다.

발단

러시아는 1903년(광무 7) 4월 압록강 하류 용암포를 점령하고 군사기지를 설치하여 조차를 요구했다. 이에 일본은 만한교환의 원칙을 내세우며 수차례 교섭을 시도했으나, 더 이상 협상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전쟁을 결의했다.

일본은 1903년 6월 23일 어전회의에 러시아와의 전쟁을 상정하여 대한제국의 어느 부분도 러시아에 양보할 수 없다는 결의를 다졌다. 이후 국제적으로 러시아가 개전의 책임이 있다는 여론을 조성하면서 러시아를 고립시키는 외교를 진행했다. 결국 1904년 2월 4일 원로회의에서 개전을 결정하였으며, 동시에 2월 8일 만주 여순항의 러시아함대를 기습 공격하였고 10일에 선전포고를 했다(『고종실록』 41년 2월 23일).

경과

대한제국 정부는 1904년 1월 21일 국외중립을 선언하고 이를 대외적으로 통고했다(『고종실록』 40년 11월 23일). 그러나 일본은 2월 9일 인천을 통해 다수의 병력을 한양에 진주시켰고, 2월 23일 강압적으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게 하여 한반도 내에서의 군사작전에 필요한 병참과 거점 확보를 합법화하였다(『고종실록』 41년 2월 23일). 그리고 대한제국이 러시아와 체결했던 조약과 러시아인에게 주었던 모든 이권을 폐기해 한반도 내에서의 러시아 세력을 일소시켰다. 또한 러시아에 주재하던 이범진 등의 외교관들에게 봉급과 경비를 지급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소환하는 조치를 취하였다(『고종실록』 41년 5월 4일). 뒤이어 5월 18일에는 공식적으로 이범진을 소환하고 공사관을 폐쇄하도록 지시했다(『고종실록』 41년 5월 18일). 이때의 지시로 대한제국과 러시아의 외교는 공식적으로 단절되었다(『고종실록』 41년 5월 18일).

일본군은 2월 8일 여순항을 기습한 이후 인천항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 전함 바리야크와 카레이츠를 격침하면서 초전의 승세를 장악했다. 일본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는 여순항을 봉쇄한 뒤 5월 5일 요동반도에 군대를 상륙시켜 인천에서 북상한 일본군 1진과 합류하도록 했다. 일본군 1진은 5월 초 압록강을 건너 구련성(九連城)과 봉황성을 함락했으며, 6월에 일본군은 15개 사단의 병력을 신설된 만주군총사령부에 소속시키고 이어 9월에 요양(遼陽)을 함락했다. 일본군은 1905년 1월에는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가 지휘하던 제3부대가 여순항을 함락했으며, 3월에는 봉천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사실상 만주에서의 육상전을 종식시켰다. 당시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일본군의 승전을 관전하기 위해 원수부의 장령들을 파견하였다(『고종실록』 41년 7월 7일). 5월에는 제2태평양함대로 불리던 발틱함대 30여 척이 동해에서 도고함대의 공격을 받아 5,000여 명이 죽고 겨우 3척만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감으로써 해전에서도 일본군이 승리하게 되었다. 대마도(對馬島) 아일해전(俄日海戰)이라고도 불리는 이 전투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전세는 거의 일본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는 국내에서 혁명이 발발한 상황이어서 일본군을 전면적으로 공격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며, 일본도 10억 엔이 넘는 막대한 전비를 조달하는 문제와 10여 만 이상이 죽은 군 병력의 손실로 인해 전쟁을 수행하기에는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결국 양국은 미국의 중재로 1905년 9월 5일 뉴햄프셔의 포츠머스(Portsmouth) 해군조선소에서 강화회담을 열게 되었다. 이때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상, 군사상, 경제상의 특별한 이권을 가지는 것을 승인하고 일본 정부가 한국에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도(指導), 보호(保護) 및 감리(監理)의 조치를 취하는 것에 대하여 저해하거나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다(『고종실록』 42년 9월 5일). 결국 일본은 러일전쟁을 통해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는 토대를 구축한 것이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 『매천야록(梅泉野錄)』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1967.
  •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 임경석·김영수·이항준, 『한국근대외교사전』,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12.
  • 러시아대장성, 김병린 역, 『구한말의 사회와 경제: 열강과의 조약』, 유풍, 1983.
  • 와다 하루키, 이경희 역, 『러일전쟁과 대한제국』, 제이앤씨, 2011.
  • A. 말로제모프, 석화정 역, 『러시아의 동아시아정책』, 지식산업사, 2002.
  • 배항섭, 「朝露 수교(1884) 전후 조선인의 러시아관」, 『역사학보』194,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