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신(痘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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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집마다 다니며 사람들에게 천연두를 앓게 하는 신령.

개설

두창(痘瘡)은 마마, 손님, 손님마마, 호구별성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15세기에 중국 방면으로부터 들어와서 20세기 초 서양 근대의학으로 서서히 퇴치될 때까지 거의 전 기간에 걸쳐 조선의 전 지역을 강타하였다. 치사율이 높은 전염병으로, 생존하여도 실명하거나 얼굴이 얽는 후유증을 동반하였다.

특히 질병의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민간에서는 두창신이 존재하며, 두창신을 잘 모셔야만 무사히 생존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두창신에 대응하는 다양한 민속이 생겨났으며, 특히 무당에게 많이 의존하였다.

내용 및 변천

두창은 인류 역사에서 오랜 기간 동안 광범위한 지역에서 큰 피해를 입힌 질병 가운데 하나이다. 두창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조선시대 태종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왕인 순종대까지 확인된다.

두창은 마마, 손님, 손님마마, 호구별성, 별성 이외에도 다양한 호칭으로 불린다. 마마는 왕이나 왕족에 붙였던 극존칭으로 두창신에 대한 외경심을 표현한 것이다. 호구는 두창신이 집집마다 사람마다 쫓아다니면서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염시킨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별성(別星)은 사명을 지닌 특별한 객성(客星)을 말한다. 두창을 손님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렇게 부른 이유는 중국에서 건너 온 두창이 손님처럼 오래 머무르지 않고 돌아가기를 바라는 심리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다양한 호칭을 통해 두창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귀신이 질병을 일으킨다고 믿었기 때문에 두창 역시 두창신이 옮기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두창에 대응하기 위한 다양한 민속이 생겨났으며, 특히 두창의 만연 앞에서는 신분 계층을 막론하고 속수무책이었기 때문에 더욱 무당에 의존하였다.

16세기에 사족과 일반민들 사이에서 두창신을 얼마나 중히 모셨는가에 대해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稗官雜記)』에서 "천연두에 걸리면 제사, 초상집 출입, 연회, 성생활, 외부 사람, 기름과 꿀, 비린내와 누린내, 더러운 냄새 등을 특히 주의하여 금기했다. 이외에도 꺼리는 바는 다 적을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이를 범하면 열명 중에 육칠명은 죽지만,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도 목욕하고 빌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창신을 더욱 믿고 따랐다. 심지어 병을 치른 후 한두 해가 지났는데도 조상 제사 지내기를 꺼려했다. 혹시 두창신을 불쾌하게 할 지 모르기 때문이다. 선비라 하는 사람 중에도 아예 조상 제사를 끊은 집도 있었다. 예전에는 두창신에 대한 금기가 이렇지 않았는데, 근년에 들어서 더욱 극성을 부리니, 앞으로 40~50년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말했다."라고 하였다.

한편 17세기 후반에는 숙종이 두창을 앓자 궁중에서 무당을 맞이하여 배송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고, 세자가 두창을 앓을 때도 신에게 떡을 올리고 기도를 했다.

17세기 후반 이후 20세기 초까지 서양 근대의학으로 천연두가 서서히 퇴치될 때까지도 두창에 대한 관념과 그에 따른 민속은 앞선 시기와 거의 동일하게 지속되었다.

의의

두창은 15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조선의 전 지역에 만연하였던 치사율이 높은 전염병 가운데 하나이다. 인간사의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민간에서는 태어나서 한번은 겪어야만 하는 질병으로 인식하였고, 이를 두창신이 주관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 두창신을 잘 모시기 위한 다양한 민속적 관행을 행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 사람들의 질병관, 세계관 등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 신동원, 『조선사람의 생로병사』, 한겨레신문사, 1999.
  • 이능화 지음, 서영대 역주, 『조선무속고』, 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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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필영, 「조선후기의무당과 굿」, 『정신문화연구』53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