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사(桐華寺)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팔공산에 있는 절.

개설

동화사(桐華寺)는 832년(신라 흥덕왕 7) 심지 왕사가 중창하면서 역사에 등장하였다. 모악산금산사와 함께 신라 유가업의 대표 사찰로 성장하면서 왕실의 각별한 지원을 받았다. 고려시대 승과를 치르는 5개 사찰 중의 하나로 지정되었고, 국사와 왕사 등 여러 고승을 배출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영남 의승군의 총지휘소가 되었고, 조선후기에는 상봉정원(霜峰淨源), 호암약휴(護巖若休), 기성쾌선(箕城快善), 인악의첨(仁岳義沾) 등의 대강백을 배출하였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의 제9교구 본사이다.

내용 및 변천

(1) 신라시대

동화사는 493년(신라 소지왕 15)에 신라의 극달(極達) 화상(和尙)이 유가사(瑜伽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런데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때가 527년(신라 법흥왕 14)의 일이므로 493년 창건설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절에 대한 최초의 명확한 기록은 832년 무렵 심지(心地)의 중창 사실이다. 심지는 15세 무렵에 팔공산에서 수행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는 진표(眞表) 율사(律師)의 법을 이은 영심(永深)이 속리산에서 점찰법회(占察法會)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지만 이미 늦어 법당에 오를 수 없었다. 그러나 수행의 각오는 아무도 막을 수 없었고, 몸에서 피가 흐를 정도로 열심히 수행하였다. 마침내 붓다의 감응을 받아 간자(簡子)가 심지의 수중으로 들어왔다. 결국 영심의 인가를 받았고 팔공산에 동화사를 지어 간자를 봉안하였다.

심지의 동화사 중창은 사실상 절의 창건이나 다름없다. 이름만 남아 있던 유가사 터에 법당을 짓고 붓다의 간자를 봉안하면서 절은 빠르게 성장해 나갔다. 중창 당시 추운 겨울에 오동나무가 신비롭게 꽃을 피웠다고 하여 이름을 동화사(桐華寺)로 바꿨다.

863년(신라 경문왕 3) 무렵 심지는 여전히 동화사에서 교화를 펼치고 있었다. 경문왕이 민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863년에 비로암에 삼층석탑을 조성하였는데, 그 안에서 민애대왕석탑사리호가 발견되었다. 사리호 바깥 면에 석탑을 조성한 경위와 공덕, 발원자 등을 적은 명문이 있다.

(2) 고려시대

고려시대에 동화사는 국가의 승과(僧科)를 치르는 사찰로 지정되었다. 고려시대의 출가자는 교학과 선법을 익힌 후 동화사를 비롯해 영통사(靈通寺), 숭법사(崇法寺), 보원사(普願寺) 등의 계단(戒壇)에서 승과를 거치도록 하였다. 심지에 의해 중창된 동화사는 유가업을 진흥하는 핵심 사찰이었다. 또한 심지가 얻은 붓다의 간자는 동화사의 성물(聖物)로 중시되었는데, 고려 예종(睿宗)이 간자를 맞아들여 대궐 안에서 예배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아홉 번째 간자 하나를 분실하는 일이 발생하였고, 이를 아간(牙簡)으로 대신하여 절에 돌려보냈다. 150년이 지난 뒤 일연(一然)도 이 간자를 직접 친견하였다. 또한 1375년(고려 우왕 즉위)에는 왕이 절의 불골간자를 맞이하여 신효사(神孝寺)에 봉안하고 불사를 거행하였다.

고려시대 유가종의 여러 고승들이 동화사를 거쳐 갔다. 홍진(弘眞) 국사(國師)혜영(惠永)은 13세기 중엽 동화사에서 활동하였고, 1298년(고려 충렬왕 4) 절에 비가 조성되었다. 현재 비는 남아 있지 않으나 탁본의 일부가 남아 있는데, ‘대유가동화사’라는 비문은 절이 유가종의 대찰이었음을 말해 준다. 1324년(고려 충숙왕 11) 무렵에는 자정(慈淨) 국존(國尊)미수(彌授)가 절을 중창하였다. 국왕은 그에게 ‘오공진각묘원무애국존(悟空眞覺妙圓無碍國尊)’이라는 국존의 칭호를 내렸다.

(3) 조선시대

동화사 성보박물관에는 조선시대 의승군의 역사를 말해 주는 중요한 성보가 여러 점 있다. 승병장이 사용했던 인장 ‘영남도총섭인(嶺南都摠攝印)’과 승군을 지휘할 때 부는 소라나팔, 그리고 봉서루에 있는 ‘영남치영아문(嶺南緇營衙門)’이라는 글씨의 현판 등이다. 절은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크게 허물어졌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사명 대사 유정(惟政)은 1606년 중창 불사를 일으키고, 당시 해인사에 있던 여러 제자를 보내 중창을 돕게 하였다. 이 인연으로 조성한 사명 대사의 진영(보물 제1505호)이 지금도 남아 있다.

1725년(영조 1) 큰 화재를 입었다가 1728년(영조 4)에 중창하였다. 이때 봉안한 대웅전의 약사불상에서 고려후기의 『화엄경』과 『무상의경』, 『대보적경』 등 7종의 경전이 발견되어 보물 1607호로 지정되었다.

1880년(고종 17)에는 절을 중창하는 데 공명첩 500장을 하사하였다(『고종실록』 17년 10월 10일). 이 무렵 조선 제23대 왕 순조의 원자 효명세자(孝明世子)와 비 신정왕후(神貞王后)조씨의 능으로 현재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위치한 수릉(綏陵)에서(절은 수릉[綏陵, 조선 제23대 왕 순조의 원자 효명세자(孝明世子)와 비 신정왕후(神貞王后)조씨의 능,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서) 쓰는 향과 숯 등 제수용품(祭需用品)를 절에서 만들어 진상하였다. 그런데 화재로 진상을 계속할 수 없게 되자 절의 중건을 지원한 것이다.

(4) 근현대

1911년 일제는 사찰령을 반포하여 한국 불교를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사찰령은 한국 불교를 행정적으로 장악하고 통제하기 위한 식민지 통치 제도의 일환이었다. 전국의 사찰을 지역에 따라 30개의 본산으로 나누고, 다시 개별 사암을 본산에 편입시켰다. 일제는 한국 불교의 종단 명칭을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정하고, 본말사법을 제정하였다. 동화사도 이 때 본산이 되어 56개의 말사를 관장하게 되었다.

절은 일제하에서도 대중 포교를 위해 포교당을 창건하고, 학교의 건립에도 앞장서 근대 교육 활동을 이끌어 나갔다. 1940년 8월 동화사를 비롯하여 은해사, 김룡사, 고운사, 기림사의 경상북도 5대 본산이 재원을 출자하여 은해사에 오산불교학교(五山佛敎學校)를 개교하였다. 경상북도 5대 본산은 경북불교협회라는 이름으로 학교의 설립뿐만 아니라 경상북도 불교의 발전을 위한 여러 가지의 행보를 같이 하였다. 이보다 앞선 1937년에는 각 사찰의 사적기와 역사를 모아 『경북오본산고금기요(慶北五本山古今記要)』를 발행하였다.

1962년 대한불교조계종의 출범 이후 동화사는 25개의 교구 본사 가운데 제9교구 본사가 되어 이후 안정적 발전을 기할 수 있었다. 1976년의 금당선원을 시작으로 수행 풍토를 정립해 나갔고, 2000년 이후 강원을 설립하여 도제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1992년에는 통일대불과 통일대전을 건립하여 민족 통일의 염원을 기원하였다.

참고문헌

  • 『삼국유사(三國遺事)』
  • 『경북오본산고금기요(慶北五本山古今記要)』
  • 국립대구박물관, 『팔공산 동화사』, 국립대구박물관, 2009.
  • 한상길·심효섭, 『팔공산 동화사』, 대한불교진흥원, 2011.
  • 황인규, 「여말 선초 유가종승의 동향」, 『동국사학』39, 동국대학교 사학회, 200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