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보(同仁堡)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시대 함경도 갑산군에 설치되었던 군사시설 보(堡).

개설

함경도는 조선초기부터 여러 진보를 설치하여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고 지역사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동인보가 소속돼 있는 갑산군(甲山郡)은 본래 허천부(虛川府)였는데, 조선초기에는 호인(胡人)들에게 점거되어 여러 차례 병화를 겪으면서 거주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고려시대에 갑산만호부였던 것이 조선에 와서 1413년(태종 13)에 갑산군으로 고쳐졌다. 동인보는 갑산군에서 북쪽으로 압록강으로 가는 길목에 설치되어 외적을 감시하고 연락을 주고받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위치 및 용도

갑산군의 북쪽으로 36리(약 17.7㎞)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동인천(同仁川)이라는 하천 아래에 설치되었으며 남쪽으로는 동진(東鎭), 북쪽으로는 운총(雲寵)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동인보가 소속되었던 갑산군에는 혜산구자(惠山口子)와 가사동구자(家舍洞口子)가 동서 지역에 설치되어 압록강을 방어하였다. 동인보는 갑산부 읍치에서 각 구자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내지로 침입하는 외적을 방어하고,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1487년(성종 18) 영안도축성순찰사 홍응(洪應)은 갑산군의 방어체제 정비에 관해 논하면서 동인보가 비록 내지에 위치하고 있으나 적의 침입로가 많고, 혜산(惠山)과 운총 등의 진이 모두 큰 산에 막혀 있어서 급할 때 구원이 쉽지 않음을 들어 경솔히 혁파할 수 없다고 발언하였다(『성종실록』 18년 3월 20일). 내지로 들어오는 적군을 방어하고, 압록강에 위치한 진을 배후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변천 및 현황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등장하지 않고, 『세조실록』에 처음 기록이 보인다. 1466년(세조 12) 도체찰사한명회(韓明澮)는 함길도 갑산군에 소속된 동인보를 기존에는 권관에게 방어하게 하였으나, 권관들은 믿을 수 없다면서 갑산과 동인보를 방어하는 일을 절제사에게 위임할 것을 건의하였다(『세조실록』 12년 윤3월 10일). 이 기사의 내용으로 볼 때 문종 이후에서 세조 연간 사이에 권관이 주관하는 보의 형태로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명회의 건의로 이후 동인보는 절제사가 관장하게 되었다. 1490년(성종 21) 영안도(현 함경도) 여러 곳에 축성을 하면서 동인보에도 높이 8척(약 2.4m), 둘레 1,316척(약 399m)의 석성을 쌓았다(『성종실록』 21년 3월 30일). 또한 1512년(중종 7)에는 다시 동인보에 권관을 배속하였다.

형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동인보에는 둘레가 1,351척(약 409.4m), 높이가 8척인 석성이 있었다. 종9품직인 권관이 관할하는 군사시설이었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여지도서(輿地圖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오종록, 『조선초기 양계의 군사제도와 국방체제』, 고려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3.
  • 강석화, 「조선후기 함경도 육진지역의 방어체제」,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고승희, 「함경도 내지 진보의 변화」,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노영구, 「조선후기 함경남도 간선 방어체계」,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