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연초주식회사(東亞烟草株式會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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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에 조선 담배시장 확보와 만주·중국에서의 영미담배트러스트 구축을 위해 스즈키 상점의 가네코 나오키치가 만든 담배회사.

개설

1906년 일본의 담배산업은 소수의 거대 제조업자와 다수의 영세업자가 난립하는 이중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일본 국내에서는 전매제가 실시되고 있었지만, 만주와 중국에서는 영미담배트러스트가 시장을 석권하였다. 스즈키 상점[鈴木商店]의 가네코 나오키치[金子直吉]가 당시 전매국장 하마구치 오사치[浜口雄幸]와 상의해서 동아연초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동사 설립의 목적은 조선에서 담배시장을 확보하고, 결국에는 만주와 중국에서 영미담배트러스트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1914년 3월에 공포하고 7월 1일부터 시행한 연초세령(煙草稅令)으로 인해 영미담배트러스트가 사업 전부를 만주 방면으로 옮기면서, 동아연초는 한국에서 연초 제조판매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했다. 그러나 1921년 조선연초전매령이 실시되면서 동아연초는 조선이라는 최대 상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동아연초주식회사가 설립된 1906년 당시 일본의 담배산업은 소수의 거대제조업자와 5,000개가 넘는 영세업자가 난립하는 이중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일본 국내에서 전매제가 실시되고 있었고, 만주에서 중국까지 영미담배트러스트가 시장을 석권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즈키 상점의 가네코 나오키치는 당시 전매국장하마구치 오사치와 상의하여 동아연초를 설립했다. 가네코 나오키치의 전기 『금자직길전(金子直吉傳)』(1950)에 의하면, 가네코와 하마구치는 동향 출신이었고, 따라서 스즈키상점은 동아연초의 설립과 경영에 깊숙이 관여했다.

영미담배트러스트 사는 상하이[上海]에 있었던 담배제조회사였는데, 1906년 사원을 한국에 파견하여 인천에 판매부를 설치하고, 1907년까지 인천, 서울, 부산, 원산, 평양 등지에 특약판매점을 설치하였다. 인천, 부산, 원산의 3개소에 창고를 두어 항상 재고품을 풍부히 하고 판로 확장에 주력하였다. 영미담배트러스트 사는 한국의 상권을 두고 당시 한국에 진출해 있던 동아연초와 상전(商戰)을 벌였으나, 결국 한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지 못하고 동아연초에 밀리면서 사업 부진을 면치 못했다. 이때 연초세령이 실시되었다. 영미담배트러스트 사는 이를 계기로 사업 전부를 만주 방면으로 이동시켰다. 결국 동아연초는 조선총독부의 지원하에 당초 설립 목적이었던 영미담배트러스트 사의 구축을 실현하고, 한국에 있어서 제조판매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였다.

변천

1910년 1월 11일에는 동아연초 공장을 완공했다. 그동안 일본에서 담배를 수입하여 한국에 판매하던 것을 직접 제조하게 된 것이다. 『매일신보』의 1911년 05월 24일자 기사 ‘동아연초의 현황’에 의하면, 1911년 당시 동아연초에서는 필터[口付]가 있는 야마토[大和], 아사히[朝日], 가사고[笠子], 양쪽 끝이 모두 노출된 양절(兩切) 담배인 우에-루스, 하네리-, 비-와, 각연초(刻煙草)인 삿기, 아야메의 수종을 제조하였다. 매월 평균 권연초(卷煙草)는 2만 개들이 4천 상자 즉 8천만 개, 각연초는 6관목들이 약 7백, 8백 상자를 제조했다. 원료의 대부분은 일본과 미국에서 수입했지만, 조선인이 주로 애용했던 입자(笠子)에만 소량의 조선엽(朝鮮葉)을 사용했다. 직공은 2천 명이었는데, 대부분 조선인으로 남녀 비율이 6 대 4였다. 일본인 직공은 약 100명 정도로 모범직공으로 대우받아 교도(敎導)나 감독(監督)에 임명되었다. 이때 생산된 권연초는 순종에게 진헌(進獻)하기도 했다. 1911년 6월 2일, 순종이 동아연초의 초대사장 사사 구마타로[佐々熊太郞]에게 은으로 만든 꽃병 1개를 하사한 것은 그에 대한 답례였다(『순종실록부록』 4년 6월 2일).

동아연초는 연초전매제 실시를 위한 사전작업으로 한국인 제조판매업자의 정리에도 앞장섰다. 동아연초는 거액의 자금을 투입하여 이들을 매수하는 한편 각지에 공장을 설치하여 담배 생산의 일원화에 노력하였다. 1921년 4월 1일 조선연초전매령이 공포되고, 그해 7월 1일부터 담배의 전매가 실시되면서 조선에 있던 공장들을 800만 원에 총독부 전매국에 매각하고 조선에서 손을 뗐다. 전매국은 1910년 설치된 후 1912년 행정 간소화를 이유로 없어졌다가 연초전매제 실시를 앞두고 1921년 4월 1일 다시 설치되었다. 1921년 연초전매령 실시 당시 동아연초의 분공장과 규모를 살피면 다음의 표와 같다.

    1. 표1_00017191_동아연초주식회사의 공장 규모(1920년)

1921년에 조선연초전매령이 시행되면서 최대상권을 상실하고 경영위기에 빠진 동아연초는, 1927년 아시아연초와 합병하여 타개를 모색했다. 1930년 스즈키 상점은 가네미츠 쓰네오[金光庸夫]를 사장으로 파견하여 경영회복을 꾀했지만, 가네미츠의 척무상(拓務相) 취임을 계기로 1939년 동아연초는 만주연초에 매각되고 만다. 이때 스즈키 상점 또한 동아연초에서 철수한다.

참고문헌

  • 『每日申報』 1911년 5월 24일자, 「동아연초의 현황」.
  • 『每日申報』 1921년 5월 31일자, 「동아연초의 장래, 해산하면 사십할의 배당가능」.
  • 최돈화, 「한국연초산업의 사적고찰」, 『상학논집』14, 1972.
  • 波形昭一·木村健二·須永德武 監修, 『東亞煙草株式會社小史 ; 朝鮮煙草元売捌株式會社誌』, 社史で見る日本經濟史 : 植民地編 ; 第10卷, ゆまに書房, 2002.
  • 白石友治編, 『金子直吉傳』, 金子柳田兩翁頌德會, 1950.
  • 『鈴木商店記念館』, http://www.suzukishoten-museu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