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십자각(東十字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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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정문 좌우에 놓인 망루.

개설

고대 중국에서는 궁(宮)의 정문 좌우에 높은 망루를 설치해서 궁궐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감시했다. 이 망루를 일컬어 ‘궐(闕)’이라고 한다. 모든 황제국과 제후국의 궁에 이 시설을 설치했기 때문에 왕이 사는 집이라는 뜻의 ‘궁’과 망루인 ‘궐’이 합해져 ‘궁궐’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다. 시대가 변하면서 궐도 형태를 달리했다. 정문 좌우 곁에 붙여서 만드는 대신에 정문과 많은 거리차를 두고 먼 곳에 설치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에 십자각(十字閣)은 일종의 궐 역할을 담당하는 망루로서 경복궁 광화문(光化門) 좌우측 궁장 끝과 창경궁 홍화문(弘化門) 좌우측에 설치했다.

내용

원래 십자각은 건물의 평면이 ‘십(十)’ 자 모양을 한 전각을 지칭한다. 대부분 궁궐에서 행각의 모서리는 두 방향의 용마루가 교차하게 된다. 이곳에 높게 누각을 설치할 경우에도 양 방향의 용마루에 맞춰 건물을 만든다. 이렇게 만든 건물은 평면에서 행각이 ‘십(十)’ 자로 교차하고, 또 용마루가 서로 ‘십(十)’ 자로 교차한다. 이런 건물 역시 ‘십자각’이라고 지칭했다. 대표적인 십자각은 창경궁 홍화문 좌우측에 위치한 건물들이다. 이들에 대한 내용을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지만 『승정원일기』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승정원일기』에 등장하는 십자각은 대부분 창경궁의 십자각을 지칭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십자각은 모두 4차례 등장한다. 3차례는 조선초 세종 때의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말 고종 때의 기록이다. 1427년(세종 9)의 기록은 경복궁의 성벽 위에 있는 동서십자각이 심하게 기울어져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철거했다는 내용이다(『세종실록』 9년 3월 21일). 1433년(세종 15)에는 홍례문(弘禮門)의 동십자각, 1435년(세종 17)에는 홍례문의 서십자각에서 부엉이가 울었다는 내용이다(『세종실록』 15년 10월 27일)(『세종실록』 17년 12월 15일). 여기서 십자각의 위치가 홍례문의 좌우쪽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아는 십자각의 위치와 크게 다르다. 경복궁 홍례문은 오늘날의 흥례문(興禮門)에 해당한다. 조선초에는 흥례문 좌우측에 십자각을 만들었는데,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흥례문 좌우에 따로 십자각을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고종실록』에 등장하는 십자각은 화재와 관련한 내용이다. 1866년(고종 3)에 동십자각에 있는 훈련도감(訓鍊都監)의 가건물에서 불이 나 가건물 800여 칸과 목재가 모두 불에 타 버렸다(『고종실록』 3년 3월 6일). 같은 날 『승정원일기』를 보면 좀 더 상세한 사정을 알 수 있다. 이때는 새롭게 경복궁을 중건하는 중이었다. 따라서 경복궁 내에는 궁궐을 짓기 위한 가설건물이 매우 많이 만들어졌다. 그중에서 동십자각 인근에 만들어 놓은 훈련도감이 담당하는 화사(畫師)들의 가설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화재가 번져 주변의 치목(治木)을 담당하는 가설 건물로 옮겨 붙어 800여 칸을 태웠는데, 이곳에 보관하던 가공한 목재가 모두 소실됐다는 내용이다.

고종대에 만들어진 경복궁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에 대해 『궁궐지(宮闕誌)』에서는 모두 ‘9칸이며 이익공(二翼工)’이라고만 기록했다. 경복궁의 십자각은 평면이 사각형이며 지붕은 모임지붕이다. 따라서 앞서의 십자각과는 모습이 다르다. 하지만 십자각 하부에 위치한 성벽이 ‘십(十)’ 자 모양으로 교차하기 때문에 이런 유형의 건물 역시 십자각이라고 칭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궁궐지(宮闕誌)』
  •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1. 그림1_00017944_창경궁 홍화문과 십자각, 『조선고적도보』 10권.
      2. 그림2_00017944_경복궁 동십자각, 『조선고적도보』 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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