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東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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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관동 지역에 있었던 강호막부를 가리키는 명칭 중 하나.

개설

일본의 무장국(武藏國) 또는 강호(江戶)의 다른 이름이며, 강호막부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현재의 동경(東京)을 지칭한다. 덕천씨(德川氏)의 전국 통치 중심부로 1603년 덕천가강(德川家康)이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에 취임하여 막부를 창설하였을 때 시작되어 1867년(고종 4) 덕천경희(德川慶喜)가 모든 정권을 천황(天皇)에게 돌려준 대정봉환(大政奉還)에 이르기까지 265년간 계속되었다. 일본의 무가 정치상 가장 강대하였던 통일정권이다.

내용 및 특징

일본의 전국시대에 덕천가강은 직전신장(織田信長)과 풍신수길(豐臣秀吉)에게 협력하면서 자신의 세력 기반을 다져 나갔으며, 1590년 북조씨(北條氏)의 멸망 후에는 관동(關東) 지역으로 옮겨 2,500,000석의 영지를 지배하였다. 풍신수길이 죽은 뒤에는 오대로(五大老)의 선두로서 경도(京都) 복견성(伏見城)을 거점으로 정권을 장악해 나갔다. 그러나 오봉행(五奉行)의 한 명이던 석전삼성(石田三成)과 대립하게 되었고, 덕천가강 측[東軍]과 석전삼성 측[西軍]은 미농(美濃)의 세키가하라[關ヶ原]에서 격돌하였다. 결국 덕천가강의 동군이 승리를 거두게 되고, 덕천가강은 전후에 서군에 가담하고 있던 대명(大名)들을 처분하고 1603년 정이대장군에 취임하여 강호에 막부를 수립하고 전국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강호막부는 사농공상의 신분을 고정하고, 기독교 금지를 구실로 쇄국을 하였으며, 후에는 유교적 교화도 이용하면서 전국 지배를 강화하였다. 1867년 11월 9일 제15대 장군 덕천경희가 천황에게 모든 정권을 넘기면서 265년간 유지되었던 강호막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동무라는 용어를 조선에서는 다음과 같이 인식하고 있었다. 1747년(영조 23) 조선의 조정대신(朝廷大臣)이 왕을 인견(引見)하였을 때, 승지김상적이 동래부사의 장계와 절목을 읽자 영조가 동무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물었다. 이에 이주진(李周鎭)이 일본의 관백(關白)이 머무는 곳이라고 대답하였다(『영조실록』 23년 11월 25일).

1866년(고종 3) 조선 조정에서는 이양선 문제를 논의하는 중에, 과거 1860년(철종 11)에 서양 교인(敎人)들을 철저히 막는 일을 대마도주가 동무의 뜻에 따라 우리나라에 알려 주었다는 사실을 들어 이번에도 일본에 이양선 문제를 알리자고 하였다. 그리고 통영(統營)의 외양(外洋)에서 출몰하는 이양선들이 일본에 사단을 끼칠 수도 있으니 왜관(倭館)에 서계(書契)를 작성하여 보내 동무에게 전달되게 함으로써 변방 방어를 튼튼히 하고 일본과의 우호를 두터이 할 것을 건의하여 윤허를 받았다(『고종실록』 3년 10월 15일).

참고문헌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日本大百科全書』, 小學館, 1987.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