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왕묘(東明王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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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의 묘.

개설

동명왕은 고구려의 시조 주몽을 가리키는데,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고도 부른다. 동명왕의 묘에 관해서는 용산(龍山)에 장사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 묘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려시대부터 평양 근처 용산에 있는 옛 묘를 동명왕의 묘로 간주하였으며, 이곳에서 그에 대한 제사를 거행하였다. 그러다 1891년(고종 28)에는 동명왕묘(東明王墓)를 능으로 추봉하여 동명왕릉이라 하였다. 아울러 국가에서 향축을 보내고 매년 한식에 제향을 지냈다.

조성 경위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동명왕은 40세에 죽어 용산에 안장되었다. 용산의 위치는 정확하지 않으나, 정황으로는 오늘날의 중국 지린성 지역에 비정되는 고구려 졸본 근처로 추정된다. 고구려는 수도를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다시 평양으로 옮겼는데, 세 곳 모두에 동명왕의 사당을 두었다.

고려시대 사람들은 동명왕의 묘가 평양의 용산에 있다고 추정하였다. 1287년(고려 충렬왕 13)에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帝王韻紀)』에는 동명왕묘가 평양 용산에 있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고려사(高麗史)』「지리지」에서는 평양부 동남쪽 중화(中和) 지역의 경계에 있는 용산에 있으며, 속칭 진주묘(眞珠墓)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설은 조선시대에도 계속 이어져 사실로 굳어지게 된다. 『세종실록』「지리지」 평양부(平壤府) 조에도 동명왕묘가 평양부에서 동남쪽으로 30리쯤 떨어진 중화 지경 용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고구려의 시조가 40세 때 기린마를 타고 승천한 뒤 돌아오지 않자, 옥 채찍을 용산에 묻고 그의 이름을 동명성왕이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평안도 은산현의 천성산(天聖山) 중봉 바위에 말 발자국이 있는데, 이것이 동명왕이 타던 기린마의 발자국이라고 한다는 이야기도 실려 있다.

조선시대에 동명왕에 대한 제사는 국가 사전에서 중사(中祀)에 해당하는 ‘역대 시조’의 범주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제사는 묘가 아닌 사당에서 거행되었다. 동명왕의 사당은 별도로 건립되지 않았고, 그 신주는 단군의 사당에 합사되어 있었다. 제향은 2월과 8월에 있었다. 단군과 동명왕을 모신 사당은 1725년(영조 1)에 숭령전(崇靈殿)으로 격상되었다.

동명왕묘가 한층 더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고종대에 들어서이다. 1889년(고종 26)에 기자(箕子)의 묘를 능으로 추봉하였는데, 이를 근거로 1891년에 오위도총부 부사과박종선(朴鍾善)이 동명왕묘 역시 능으로 추봉하고 관리를 둘 것을 청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를 받아들여 동명왕묘를 동명왕릉으로 격상하고, 참봉 1명을 두어 능을 관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능에서도 일 년에 한 차례 한식에 제향을 거행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제향일이 한식에서 청명으로 바뀌었다(『고종실록』 28년 7월 20일).

변천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능이 무너지고 퇴락하자, 1917년에 총독부의 명으로 중수하였다. 현대에 들어와 북한에서는 1974년에 동명왕묘를 발굴·조사하고, 1994년에 개건하여 성역화하였다. 2004년에는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하였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김영관, 「고구려 동명왕릉에 대한 인식변화와 동명왕릉중수기」, 『고구려연구』20,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