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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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년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편찬한 지리지.

개설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는 1656년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편찬한 지리지이다. 줄여서 『여지지(輿地志)』라고도 한다.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찬 전국 지리지로 16세기 후반 이후 전국적으로 활발히 제작된 사찬 읍지(私撰邑誌)의 성과를 집대성한 결과물이다.

편찬/발간 경위

이 책은 1656년(효종 7) 편찬되었다. 유형원은 읍지의 종합을 통해 지리적 정보의 전달을 전국적인 범위로 확대시켜, 국가적인 차원에서 각 지역과 사회에 대한 정확한 파악을 하고자, 이 책을 편찬하였다.

서지 사항

9권 10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필사본이다. 크기는 세로 30.1cm, 가로 20.8cm이며,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 책의 구성은 권1 경도(京都)ㆍ한성부ㆍ개성부, 권2 경기, 권3 충청도, 권4 상하(上下) 경상도, 권5 상하 전라도, 권6 황해도, 권7 강원도, 권8 함경도, 권9 평안도로 되어 있다. 이 중 권4의 상(上)에 해당하는 경상도 35개 군현의 읍지가 결여되어 있다.

유형원은 『명일통지(明一統志)』의 편찬 원칙을 따르는 동시에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참고하여, 『동국여지지』를 저술하였다. 그런데 『동국여지승람』 또한 『명일통지』의 체제를 따랐다는 점에서 두 지리지는 사실상 동일한 체재를 지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지리지는 내용에서 차이를 보였다. 인물조의 경우 출신 지역이 아니라, 활동 지역을 중심으로 인물을 수록하였는데, 도덕과 절행(節行), 공적과 사업이 그 기준이었다.

먼저 도덕과 절행의 측면에서는 성리학적(性理學的) 의리명분(義理名分)을 강조하였다. 병자호란의 충격으로 성리학적 질서의 회복이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이었다. 유형원은 성리학적 질서의 회복은 현실의 보수가 아니라, 개혁을 통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유형원이 공적과 사업을 중시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그는 ‘동사’를 전거로 삼아, 현실과 제도의 개혁을 구상하였던 것이다.

그가 지은 『동국여지지』의 특색은 다음과 같다.

첫째, 17세기 이래 실학파 지리학의 주요한 흐름이 된 강역ㆍ위치ㆍ지명 등 역사 지리적인 측면을 중시하였다. 또한 그 결과를 지리지에 결합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우리 국토에 대한 관심의 증가는 우리나라 문화와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자국(自國)ㆍ자기(自己) 중심적인 공간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렇게 강역(疆域)을 중시한 결과 북부 지방과 만주 지역에 대한 적극적인 고찰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둘째, 지역을 위주로 문제를 인식하고 지지를 편찬하여, 지역의 실상에 접근하는 지지를 편찬하려 하였다. 이러한 사실적인 국토 인식은 산천, 형승, 고적, 인물 관계 기록에서 특징적으로 드러난다.

셋째, 실증적이고 실용적인 지지 편찬 방식이 돋보이는데, 이 책은 지역의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체계화하려 하였다. 군현마다 저자가 상세하게 수정한 곳, 앞으로 보충해야 할 곳, 가보지 못한 곳 등을 나누어 표시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인물 조에서는 다양한 역사적 인물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찬자의 역사인식이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물조의 선정 기준과 평가 방식을 보면 유형원의 역사인식을 짐작할 수 있다. 『동국여지지』는 『반계수록』의 기초 자료로 활용되었다.

의의와 평가

유형원의 동사(東史) 연구에서는 중화주의를 탈피하였다고 이해가 되며, 특히 북방고대사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이 주목되었다. 하지만 유형원이 성리학적 의리명분을 강조하였음을 염두에 두면, 그가 중화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가 고조선(古朝鮮)과 고수려(高句麗)를 비롯한 북방 고대사에 관심을 가졌던 까닭은 조선 고유의 독자적인 역사의 연원과 계보를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노력은 같은 시기 서인(西人)ㆍ노론(老論)의 주자(朱子) 유일주의와 구분된다. 서인ㆍ노론은 명나라 중심의 중화질서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반면에 유형원은 ‘동사’에서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발견하고 이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유형원은 조선의 현실과 직접 대면하기 위해 ‘동사’를 연구하였던 것이고 이는 조선(朝鮮)의 문명의식의 발로였다.

이 책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간행된 지 130여년이 지난 이후 다시금 구상된 전국 단위의 지지(地誌) 자료라는 점에서 그 일차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국가주도의 관찬지리서는 아니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영조 때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 사이의 중간 공백을 메워주는 매우 소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동국여지지』에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없었던 ‘역대사지(歷代史志)’조를 두어 그 강리분합(疆理分合)의 내력을 수록하고 있는데, 이는 한백겸(韓百謙)의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 이후 고조된 역사지리적 관심의 반영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동국여지지』에서는 그 첫머리부에 한전(旱田)ㆍ수전(水田) 등 토지의 면적을 항목으로 편성하고, 그 단위를 ‘경(頃)’으로 하고 있는 점도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현상으로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인물 조에 대한 분류가 세분화되기 시작하는 점이 주목된다. 먼저 명현(名賢) 항목부터 시작하여 유우(流寓), 인물 등의 순으로 되어 있어, 이른바 사림문화로 이해할 수 있는 조선중기의 사정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여주지역의 인물과 가문, 학맥 등을 이해하는데 주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강서연, 「조선시대 도시연구를 위한 지리지의 기초연구 : 『동국여지지』ㆍ『여지도서』ㆍ『여도비지』ㆍ『대동지지』를 중심으로」, 『건축역사연구』 제21권 제5호 통권84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12.
  • 박인호, 「동국여지지를 통해 본 유형원의 역사의식」,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학위논문, 1989.
  • 양보경, 「반계 유형원의 지리사상; 「동국여지지」와 「군현제」의 내용을 중심으로」, 『문화역사지리』4호,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 1992.
  • 윤인석, 「조선시대 도시연구를 위한 지리지의 기초연구: 『동국여지지』ㆍ『여지도서』ㆍ『여도비지』ㆍ『대동지지』를 중심으로」, 『건축역사연구』 제21권 제5호 통권84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12.
  • 정의성, 「동국여지지에 대한 고찰」, 『문헌정보학연구』 제6집, 광주대학교,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