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사략(東國史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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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3년(태종 3) 8월에 권근(權近) 등이 편찬한 사서(史書).

개설

『동국사략(東國史略)』은 1403년(태종 3) 8월에 권근(權近) 등이 편찬한 사서(史書)다. 일명 ‘삼국사략(三國史略)’이라고도 한다. 이 밖에도 ‘동국사략’이라 불리는 저서는 여러 종류가 있다. 16세기에 이우(李嵎)ㆍ박상(朴祥)ㆍ유희령(柳希齡)ㆍ민제인(閔齊仁) 등이 각각 『동국사략』을 지었으며, 1906년에 현채(玄采)가 지은 『동국사략』도 있다. 여기서는 최초의 『동국사략』을 말한다.

이 책은 단군조선을 시발점으로 하여, ‘기자조선ㆍ위만조선ㆍ한사군ㆍ이부(二府)ㆍ삼한ㆍ삼국’의 순으로 서술해, 조선시대에 들어와 처음으로 고대사의 체계를 수립하였다. ‘단군ㆍ기자ㆍ위만’의 3조선을 설정한 것은 이미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서 보인 바로서, 이것을 그대로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삼한에 대한 서술은 『삼국유사』에 따라 마한을 기자의 후예로, 진한을 진(秦)의 유망인으로, 변한을 출자불명(出自不明)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는 삼한 70여 국을 모두 단군의 후예로 본 『제왕운기』의 삼한 서술과도 크게 다르다.

한편 삼한의 위치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서 최치원과 『후한서』의 설을 따르고 있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대신 『당서(唐書)』를 좇아, 마한을 백제 지방, 변한을 고구려 지방, 진한을 신라 지방에 비정하는 새로운 설을 내세웠다. 이 설은 그 뒤 『동국통감』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사서들에 통설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삼한 다음에 2부를 설정한 것도 『삼국유사』를 따른 것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에서 보이는 낙랑ㆍ부여ㆍ대방ㆍ흑수ㆍ옥저ㆍ가야ㆍ발해 등의 국가는 『동국사략』에서 독립적인 위치를 잃고 말았다. 이것은 상고사 체계가 그만큼 단순화되고 일원화된 것을 뜻한다.

삼국시대에 관한 서술은 신라를 위주로 하여, 신라의 연기(年紀) 밑에 신라ㆍ고구려ㆍ백제의 순으로 사건을 서술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신라를 삼국의 주인으로 설정한 이유에 대해, 권근은 신라가 ‘선기후멸(先起後滅: 가장 먼저 건국하고, 가장 늦게 멸망함.)’한 까닭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서술 방법은 뒤에 많은 비판을 받아서,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에서는 삼국을 대등하게 서술하는 방법으로 바뀌었다.

이 책은 편년체 사서로서 주자의 강목법(綱目法)에 따라, 사건의 큰 줄거리를 먼저 서술하고, 다음에 그 세목을 작은 글씨로 서술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로써 이 책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강목법을 따른 효시이기도 하다.

편찬/발간 경위

여기서는 최초의 『동국사략』을 말하는데, 1402년 6월에 왕명으로 착수되어 이듬해 8월에 완성되었다. 하륜(河崙)ㆍ권근ㆍ이첨(李詹) 등이 편찬에 참여했으며, 권근이 그 주역을 담당하였다. 서문과 전문(箋文)을 모두 그가 썼고, 50여 편의 사론(史論)도 대부분 그가 썼다.

서지 사항

6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고활자본(古活字本)이다. 크기는 세로 32.4cm, 가로 20.3cm이며,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 책은 별다른 목차나 서문이 없이 주요 사건들을 나열한 편년체(編年體) 사서이다. 면수는 총 184면으로 1-73면은 단군조선부터 후삼국시대까지, 73-184면은 고려시대의 기록이다. 주요 내용은 국가의 흥망성쇠(興亡盛衰) 관련 사건이나, 군주에게 귀감이 될 만한 사례로서, 전쟁ㆍ외교ㆍ천재지변ㆍ왕위 교체ㆍ관료의 임면 등이다. 상고 시대는 단군왕검(檀君王儉), 기자동래(箕子東來), 위만조선(衛滿朝鮮), 기준(箕準)의 마한(馬韓)으로 망명, 삼한(三韓)의 위치, 사군 이부(四郡二府), 삼국의 건국(建國) 신화 등이 수록이 되었다.

삼국시대의 수록 내용은 왕위(王位)의 교체, 주요 관제(官制)의 정비, 내정(內政)의 문란, 대외관계 등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그 중 내정의 문란으로는 비담(毗曇)ㆍ염종(廉宗)의 반란, 김지정(金志貞)의 반란과 혜공왕(惠恭王)의 즉위 과정, 의자왕(義慈王)의 실정(失政),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전횡(專橫)과 남생(男生) 형제의 권력 쟁투(爭鬪) 등을 수록했다.

대외관계는 주로 문물 수입과 외교, 전쟁 기사가 주류를 이룬다. 모구검(毋丘儉)의 침략, 삼국 간 전쟁, 삼국과 중국간의 외교, 수(陏)ㆍ당(唐)의 고구려 정벌과 안시성(安市城) 전투, 신라의 백제 정벌, 신라의 당나라 원병(援兵), 태평송(太平頌) 제작 등이 실려 있다. 그리고 수록된 설화들의 경우 대부분 충효와 윤리를 강조하는 내용이다.

만파식적(萬波息笛), 화왕계(花王戒),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박제상(朴堤上), 김후직(金后稷), 온달(溫達), 손순(孫順), 선덕여왕(善德女王)의 모란 설화가 그것이다. 이밖에도 강수(强首)와 최치원(崔致遠)의 뛰어난 문장,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묘호(廟號)에 대한 외교 분쟁, 대조영(大祚榮)의 출자(出自)에 관한 내용들이 수록되었다.

고려시대는 후삼국의 분열과 고려의 통일과정, 반란 및 역모, 유교적 문치주의 제도 마련, 대외관계, 군주(君主)의 현부(賢否), 이성계(李成桂)의 활약과 조선의 건국, 성리학(性理學)의 전래에 관한 내용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먼저 후삼국의 분열과 고려의 통일 과정에는 진성여왕(眞聖女王)의 실정(失政),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의 자립(自立), 궁예의 실정(失政), 왕건(王建)의 고려 건국, 견훤의 경주(慶州) 공략, 견훤의 유폐(幽閉), 마의태자(麻衣太子) 설화 등이 수록되어 있다. 반란 및 역모에는 왕규(王規), 김치양(金致陽), 강조(康兆), 이자겸(李資謙), 묘청(妙淸), 무신(武臣), 김보당(金甫當), 김용(金鏞), 신돈(辛旽), 기철(奇轍), 조일신(趙日新), 김지경(金之鏡) 사건 등이 들어있다. 유교적 제도 마련에는 과거(科擧) 실시, 최승로(崔承老)의 시무(時務) 28조, 불사(佛寺) 창건 논란, 동성간(同姓間) 혼인(婚姻) 금지, 평양(平壤)의 기자(箕子) 사당 수축, 우필흥(于必興)의 복제(服制) 개정 건의나 이색(李穡)의 삼년상 건의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평가도 이루어졌다. 최치원(崔致遠)ㆍ설총(薛聰)ㆍ강감찬(姜邯贊)ㆍ최충(崔沖)ㆍ박인량(朴寅亮)ㆍ김부식(金富軾)ㆍ김취려(金就礪)ㆍ이규보(李奎報)ㆍ최충헌(崔忠獻)ㆍ조충(趙沖)ㆍ서능(徐稜)ㆍ최항(崔沆)ㆍ손변(孫抃)ㆍ이현(李峴)ㆍ최의(崔竩)ㆍ정운경(鄭云敬)ㆍ주인원(朱印遠)ㆍ주열(朱悅)ㆍ허공(許珙)ㆍ정가신(鄭可臣)ㆍ이승휴(李承休)ㆍ김방경(金方慶)ㆍ안향(安珦)ㆍ홍자번(洪子藩)ㆍ우탁(禹倬)ㆍ이혼(李混)ㆍ백이정(白頥正)ㆍ이제현(李齊賢)ㆍ박충좌(朴忠佐)ㆍ민적(閔績)ㆍ정몽주(鄭夢周)ㆍ이성(李晟)ㆍ김태현(金台鉉)ㆍ한종유(韓宗愈)ㆍ정보(鄭保)ㆍ이존오(李存吾)ㆍ윤택(尹澤)ㆍ이곡(李穀) 등에 대한 인물평 및 졸기(卒記)가 수록되어 있다.

대외관계로는 거란(契丹)ㆍ여진(女眞)ㆍ송(宋)ㆍ원(元)ㆍ명(明)ㆍ일본(日本)과 관련된 사항들이 들어있다. 거란 관계는 소손녕(蕭遜寧)의 침입과 서희(徐熙)의 담판, 귀주대첩(龜州大捷), 여진과의 관계는 윤관(尹瓘)의 동북(東北) 9성 축조, 송(宋)과는 사신파견과 군사원조, 원나라와의 관계는 공녀(貢女), 정동행성(征東行省) 설치, 충숙왕(忠肅王)과 충혜왕(忠惠王)의 복위(復位), 입성(立省) 책동 등이며, 명나라와의 관계는 외교 갈등 문제를 들 수 있으며, 일본(日本)과의 관계는 일본 정벌, 왜구 문제 등이 실려 있다.

군주들의 현부(賢否)는 주로 원 지배기의 군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충렬왕(忠烈王)의 유락(遊樂)과 충혜왕(忠惠王)의 황음무도함, 충선왕(忠宣王)의 개혁정치를 서술하고 있다. 태조(太祖)이성계(李成桂)의 역할과 관련해서는 홍건적(紅巾賊)ㆍ왜구(倭寇)의 격퇴, 위화도 회군(回軍) 등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기타 사관(史官)이나 보우(普愚)의 한양(漢陽) 천도설 등에 대한 내용도 수록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의 가장 큰 특색은 ‘춘추대의론’에 입각해 준엄한 역사 비평을 가하고, 명분에 맞지 않는 명호(名號)를 과감하게 바꾼 데에 있다. 예를 들어, 삼국의 연기를 사실에 맞게, 즉 ‘위년칭원법(卽位年稱元法)’을 따르지 않고,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을 쓴 것이 그 한 가지이다. “하늘에 두 태양이 없고, 땅에는 두 임금이 동시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거서간ㆍ차차웅ㆍ이사금’과 같은 신라의 고유한 왕호가 비야(鄙野)하다는 이유로 모두 왕으로 고쳐 썼다. 또한 ‘여왕ㆍ태후ㆍ태자’ 등의 칭호도 제후의 명분에 맞지 않는다 하여, ‘여주ㆍ대비ㆍ세자’로 고쳐 썼다.

고대의 ‘제천행사ㆍ불교행사ㆍ도교행사’, 기타 관혼상제에 관련된 사건들에 대해서도 이를 이단문화, 또는 강상(綱常)의 윤리에 어긋나는 행위, 또는 제후의 명분에 어긋나는 행위로서 일일이 준엄한 비판을 가하였다.

그리고 신이한 내용을 담은 신화나 전설은 황탄불경(荒誕不經:근거가 없고, 허황되며, 상도에 어긋남)한 것으로 여겨서, 대부분 삭제하고 싣지 아니하였다. 결국 이 책은 엄격한 성리학적 명분론을 기저에 깔고, 고대문화를 해석하였기 때문에 『삼국사기』보다도 비판적인 입장에서 고대문화를 정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동국사략』에 나타난 찬자의 역사의식은 태종대의 정치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즉, 요동정벌운동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고, 서얼 왕자를 세자로 책봉해, 적실 왕자들을 소외시킨 정도전(鄭道傳) 일파를 제거하고 집권한 태종과 그를 보좌한 권근ㆍ하륜 등은 성리학적 명분론을 강하게 표방함으로써,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역사 서술에 투영시켜 한국사 체계를 재구성하고자 한 것이 바로 『동국사략』의 편찬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참고문헌

  • 남지대, 『조선전기의 역사의식』, 한국사상사대계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 정구복, 「『동국사략』 해제」, 『동국사략』, 여강출판사, 1986.
  • 한영우, 『조선전기사학사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