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교(東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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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의 동쪽 가까운 지역을 통칭하는 명칭.

개설

동교(東郊)는 도성의 동쪽 지역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조선전기에는 주로 매 사냥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거나 군사들을 사열하고 훈련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때로는 왕이 백성들과 직접 교유하면서 농사의 작황을 확인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말을 기르는 목장의 기능이 추가되기도 하였고, 빈번하게 발생하는 흉년으로 인해 사망한 이들을 위한 제사 공간으로도 활용되었다. 19세기 이후가 되면 왕실의 의례 공간으로서의 동교가 정치적으로 보다 중요한 위치를 지니게 되었다.

내용 및 특징

『이아(爾雅)』에 따르면 교(郊)는 도성 혹은 읍성 밖 100리(약 40㎞) 이내를 뜻한다. 50리 이내의 경우에는 근교(近郊)로, 100리 이내의 경우 원교(遠郊)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이는 왕기(王畿)가 1,000리일 경우를 가리키며 만약 왕기가 100리이면 교(郊)는 10리가 된다. 사전적인 의미는 그러하지만 반드시 실제에 교(郊)의 의미가 그러한 거리로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도성의 외곽을 교로 편성하면 방위에 따라서 교라는 명칭을 붙였다. 그래서 도성의 동쪽은 동교(東郊), 도성의 서쪽은 서교(西郊)라고 불렀다. 이들 지역은 도성의 외곽이라는 의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 행사와 관련된 중요한 공간으로 규정지어졌다.

조선시대 동교는 현재 도성의 동쪽 성저(城底) 10리를 가리켰다. 이 지역은 동쪽으로 용마산(龍馬山), 서쪽으로 남산(南山)을 끼고 멀리 불암산(佛巖山), 수락산(水落山)에서 발원하는 중랑천(中浪川)과 인왕산(仁王山), 북악산(北岳山)에서 시작하여 도성을 관통하여 온 청계천(淸溪川)이 합류하면서 만들어 놓은 퇴적 평야였다. 세종 대에는 동교의 범위를 아차산(峨嵯山)까지로 이해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30년 11월 4일).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에 따르면 "동교는 그 토질이 기름지고 물과 풀이 넉넉하여 마필을 놓아기르는 데 매우 적합하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좋은 말이 만여 마리나 되는 듯싶은데, 마치 구름떼가 몰린 것 같다. 그 들판 가운데 높은 언덕이 있어 그 형상이 가마솥을 엎어 놓은 것과 같다."고 하였다.

변천

동교의 공간적 의미는 시대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났다. 태종대에는 주로 사냥을 위한 공간이었다. 특히 태종은 동교에 가서 매 사냥을 즐기고 고니를 잡아서 덕수궁(德壽宮)에 바치기도 하였다(『태종실록』 6년 2월 10일). 또한 무과 시험을 위한 시험장으로 쓰이기도 했다(『태종실록』 10년 3월 11일). 문종대에 이르면 왕이 직접 군대를 사열하는 친열(親閱) 및 열무(閱武)를 위한 공간이기도 하였다. 사열은 넓은 공간에서 진행되어야 하는데 도성 내에는 그러한 공간이 부족했으므로 대규모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동교가 적합한 지역으로 선정되었다. 문종은 마병과 보병 2,500명을 눈보라 속에서도 직접 사열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11월 20일).

단종대 이후부터 왕이 한 해의 풍흉을 확인하기 위하여 동교로 직접 나아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단종은 농사의 작황을 구경하기 위하여 동교에 직접 행차하였다(『단종실록』 2년 9월 18일).

성종대에 이르면 동교가 농사의 작황을 확인하기 위한 공간으로 바뀌어갔다. 성종 대에 성학(聖學)이 강조됨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왕의 행동 양식 또한 특정 공간의 의미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성종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사냥터로서의 동교는 이제 거의 사라지고 말을 기르는 목장(牧場)으로서의 기능이 더욱 부각되었다. 동교는 지형이 주로 넓은 들판이었으므로 말을 기르기에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동교에는 일찍부터 사복시에서 관할하는 목장이 있었는데 정조대에는 400여 필의 말이 길러지고 있었다.

조선후기 동교의 또 다른 특징으로 제사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된 점을 들 수 있다. 현종대에 경신대기근으로 국가적으로 위기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 때 윤휴의 제안에 따라 굶어 죽은 귀신에 대한 위령의 의미로 신하를 보내 동교를 비롯하여 서교와 남교에서 제사를 지내게 했다(『숙종실록』 1년 7월 21일).

심지어 무덤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1694년(숙종 20) 당시 숙종은 관원을 파견하여 동교에 있는 여러 무덤에 제사를 지내도록 조처를 했는데, 1671년(현종 12)의 기근으로 굶어 죽은 사람들이 동교에 많이 매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숙종실록』 20년 2월 25일). 혹은 동교에 특별히 제단(祭壇)을 설치하여 전염병으로 사망한 사람들에 대한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19세기 후반 이후가 되면 왕실의 의례 공간으로서 동교가 부각되었다. 왕의 능행(陵幸), 왕실의 장례식 등이 지속적으로 동교에서 진행되었다. 동교는 왕실의 시조인 태조의 건원릉(健元陵)을 비롯하여 이른바 동구릉이 위치하고 있는 곳이었다. 특히 고종과 순종대를 거치면서 식민지 시기에까지 능행과 왕실의 장례식 행차가 동교를 통해 이루어졌다. 국왕의 행차가 이루어지는 공간은 국왕이 백성들과 만나는 소통의 장소이자 정치의 공간이면서 의례가 엄숙하게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조선후기 이래 왕릉이 지속적으로 늘어나면서 그에 따른 국왕의 능행도 점차 그 횟수가 늘어갔다. 그것은 결국 의례 공간으로 동교의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최완기, 『조선시대 서울의 경제생활』, 서울학연구소, 1994.
  • 김지영, 「근대기 국가 의례의 장으로서의 東郊」, 『서울학연구』36,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2009.
  • 장지연, 「권력관계의 변화에 따른 東郊 壇廟의 의미 변화」, 『서울학연구』36,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2009.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지명사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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