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협회(獨立協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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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7월 근대적 자주 독립 국가체제를 지향한 정부관료, 개화파, 유학파 등이 중심이 되어 창립한 시민 정치단체.

개설

1895년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이후 일본과 러시아 등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여 근대 자주독립국가를 설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결사한 관민 합작의 단체이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896년 이상재, 남궁억 등이 민권옹호, 정치개선촉진이라는 2대 표방하에 유사 정당 단체인 건양협회(建陽協會)를 조직했다. 건양협회는 계동(桂洞)에 위치했는데, 간판만 유지할 정도로 미약한 수준이었다. 이때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이 박영효를 통해 반역죄가 사면되고 개화파가 득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1895년 12월 귀국해서 이듬해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있었다. 건양협회는 정부의 고문이던 서재필의 도움으로 7월 2일 미국 문화를 체험했던 이완용, 윤치호를 비롯한 개화파들과 독립협회를 창립한다. 『독립신문』은 협회의 기관지가 된다.

독립협회의 강령은 충군애국(忠君愛國)과 자주독립이었다. 설립 초기에는 정부 관료가 중심이 되어 운영하였으나 점차 관리, 상민, 군인, 학생 등 사회 각 계층이 참여하는 시민 단체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한국사에서 최초로 시민이 중심이 된 근대적인 정치단체로 발전한다.

독립협회는 조선에 교육 개혁과 산업 개발 같은 서구 유럽국가의 체제를 도입하여 근대국가 사회체제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마침 고종의 황제 즉위와 대한제국 선포에 상응하여 제국의 발전을 위한 단체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주장하며 구국운동을 위한 상소를 올렸으며, 외국의 간섭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배격의 대상으로 삼은 외국은 주로 러시아였다. 특히 1898년 3월 10일 종로에서 개최한 만민공동회는 러시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를 주장했고, 정부에서는 이 사안을 러시아공사에게 전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독립협회의 일련의 활동은 일본을 비롯한 영국과 미국이 배후에서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려는 의도에 말려들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또한 의회설립과 정치개혁 등 민감한 사안을 다루어 고종이 해산시키는 결과를 야기하기도 하였다.

조직 및 역할

독립협회는 청국으로부터의 자주독립을 제일 목표로 하여 사대의 상징이었던 영은문을 헐어 독립문과 독립관 등을 건립하였다. 따라서 협회의 주요 구성원은 중화질서 체제를 거부하는 개화파 인물이 중심이었다. 창립 주도세력은 갑오개혁 집권관료 세력, 윤치호, 이상재, 이완용, 서재필 등의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 세력이었다. 독립협회는 고문에 서재필, 회장안경수, 위원장이완용 외 김가진·이상재 등 8명의 위원과 송헌빈·남궁억·오세창 등 10명의 간사원으로 구성되었다. 회원 자격은 독립문 건립 보조금을 내고 가입에 찬성한 자였다. 설립기 협회는 고종의 지원을 받을 정도로 관과 민간이 함께 참여한 반관반민적 구조였다.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을 수리해 만든 독립관의 현판도 순종의 글씨였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국민계몽을 목적으로 토론회를 개최했는데, 주로 정부 정책을 비판하여 관료층이 이탈했다. 반면 이를 계기로 협성회(協成會)와 광무협회(光武協會) 등 신교육을 받은 지식인이 대거 참여하여 정치운동단체로 변화하였다. 특히 1898년 2월부터 구국선언상소(救國宣言上疏)를 시작으로 만민공동회, 관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본격적인 정부비판과 의회설립운동 등을 주도해 갔다.

변천

고종은 독립협회가 의회운동과 민권운동을 주도하면서 황제권을 위협한다고 인식하여 보부상이 중심이 된 황국협회(皇國協會)를 이용하여 독립협회를 공격하고 해산시키는 수순을 밟았다. 결국 1898년 5월 서재필이 출국되고, 이완용 등의 관료들이 등을 돌린 상황에서 관민공동회가 황국협회의 공격을 받아 와해되고 회원들이 체포되어 조직이 해산되는 과정을 겪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주한일본공사관일기(駐韓日本公使館日記)』
  • 『독립신문(獨立新聞)』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