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처승(帶妻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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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하여 아내와 자식을 거느린 승려.

개설

대처승(帶妻僧)이란 살림을 차리고 처자식을 거느린 채 수행과 포교를 행하는 승려를 말한다. 처자식을 거느리는 자체가 불교의 계율에 어긋나므로, 이들은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수행하는 독신 승려와 구분되었는데, 대부분 파계승으로 간주되었다. 한국 불교사에서 대처승은 어느 시대나 존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부족한 국가 노동력에 충당하기 위해 환속시켜야 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따르면, 가정을 거느리고 있는 승려를 일반적으로 화택승(火宅僧)이라고 불렀는데, 황해도와 평안도, 함경도 등지에서는 처자를 거느린 승려를 재가승(在家僧)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불교계에서는 혼인하지 않는 비구승 제도가 유지되었기 때문에, 대처승은 승가(僧家)에 포함되지 않는 ‘피역지민(避役之民)’ 또는 파계승으로 분류되었다. 이들의 존재는 불교식으로 제사를 올리는 곳에 찾아가거나 초상집에 달려가 옷과 먹을 것을 엿보는 미천한 승려들과 동일하게 인식되었다. 조정의 관리나 유학자들도 대처승들을 수행보다는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으로 승려 행세를 하는 가짜 중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 때문에 이들은 노비 출신으로 승려가 된 부류와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

예종과 성종대에는 도첩제가 강화되면서 무도첩승과 대처승에 대한 엄격한 조치가 내려졌다. 예종은 도첩이 없이 출가한 자에게 곤장 100대를 때려 본래의 역으로 돌아가게 하라는 조치를 내렸다(『예종실록』 1년 10월 27일). 또한 1490년(성종 21)에 성종은 사간원 정언(正言)이수공(李守恭)의 건의에 따라, 도첩(度牒)이 없는 승려와 대처승을 모두 찾아내 죄를 다스리도록 하였다(『성종실록』 21년 1월 27일). 이는 불교를 억압하려는 의도보다는 당시 국가적인 측면에서 각종 부역이나 군역을 담당할 노동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내려진 조치였다고 여겨진다. 같은 날 성종은 각 도의 관찰사에게 글을 내려, 대처승이 적지 않은데 환속시켜 군대에 보충하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며 대처승을 찾아내는 데 힘을 기울이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예종과 성종대의 이러한 환속 조치는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더욱이 국가에서 시행하는 사찰의 중건 공사나 각종 부역 등에 도첩이 없는 승려들을 동원한 뒤 도첩을 발급해 주는 경우가 빈번해, 국가에서 공인한 승려의 수는 오히려 늘어났다. 성종은 도첩이 없는 승려와 대처승을 조사하여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감사와 수령들이 수행하지 않으니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며 개탄하였다. 하지만 승려들도 조선의 백성이니 그들을 필요 이상으로 괴롭히는 것은 옳지 못하므로, 사람들이 대처승을 고발하면 환속시켜 부역에 동원하도록 하였다. 결국 조선시대의 대처승은 신분상으로는 천민과 다름없는 무리였으며, 조정에서는 각종 부역에 동원할 노동력이 부족할 때마다 이들을 색출하여 환속시켰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안계현, 『한국불교사연구』, 동화출판공사, 1982.
  • 이재, 「조선전기의 노비연구」, 『숭전대학교논문집』3, 숭전대학교, 1971.
  • 이재, 「노비」, 『한국사 10, 조선양반관료국가의 사회구조』, 국사편찬위원회,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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