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전(唐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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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수입되어 조선에서 사용되던 화폐.

개설

당전은 중국당대에 주조되어 사용하던 화폐였다. 당전은 당을 건국한 고조(高祖) 때 주조하였다고 하여 개원통보(開元通寶)라고도 하였다. 여기서 개원(開元)은 개국건원(開國建元)의 준말로 당의 창업을 기념하는 의미였다. 621년 처음 발행되었으며, 그 후 역대 왕조 화폐의 표준형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개경을 중심으로 유통경제가 발달하였던 고려시대 때부터 이미 당전이 사용되었다. 일본의 경우 8세기 초 당전을 모델로 하여 화동개보(和同開寶)라는 화폐를 처음 주조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당전은 18세기 동전 유통의 확산과 함께 수입 논의가 적극적으로 제기되었다.

내용 및 특징

18세기 후반 조선에서는 당전에 대한 수입 유통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때에는 중국으로 가는 역관을 통하여 당전을 수입할 세부 지침, 즉 절목(節目)까지 마련되기도 하였다. 절목의 첫 조항에서는 수입할 당전의 수량을 정하지 않고 마음대로 하게 한다면 값이 폭등하거나 폭락하는 폐단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여 1년에 수입할 수량을 100,000냥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이 동전은 매년 절사(節使)와 역행(曆行)으로 두 차례 중국을 방문할 때 구입해 오도록 하였다. 다만 부득이하게 아문(衙門)에서 사용해야 할 일이 있으면 조정에 보고하고 추가로 수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마지막으로 당전이 유통된 이후 개인이 수익을 볼 목적으로 불법적으로 수입하여 유통하면 극형에 처한다는 처벌 규정을 실었다(『정조실록』 16년 10월 6일). 그러나 이와 같은 결정에 대하여 반대 의견도 없지 않았다. 이듬해 집의정택부(鄭澤孚)는 당전을 사용하는 것은 이로울 것이 전혀 없다면서 강하게 반대하였다(『정조실록』 17년 3월 10일). 18세기 당전 수입 논의는 왕조 재정의 악화를 해소하기 위한 목적이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국내에서 주조하는 것보다 더 큰 이익이 되고, 동전 원료 확보를 위한 걱정도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전 수입 논의는 18세기 후반 국내 화폐유통경제가 활발하게 진행되었음을 보여 주는 모습이기도 하였다.

변천

조선시대 동전화폐의 유통은 1678년(숙종 4) 상평통보(常平通寶)가 주조되고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조선전기에는 저화(楮貨)와 추포(麤布)가 화폐의 기능을 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가 되면 동전 유통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동전은 저화나 추포에 비하여 휴대가 용이하고 손상 위험이 덜하기 때문에 유통화폐로서 활용가치가 높게 인식되었다. 그럼에도 효종 연간에 잠시 동전이 주조되긴 하였으나 본격적인 유통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조선은 1678년(숙종 4) 영의정허적(許積)의 제안에 따라 상평통보를 주조하였고, 이것이 전국적으로 유통되면서 화폐경제가 정착할 수 있었다. 상평통보는 조선말기까지 법정통화로서 기능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화폐유통이 처음부터 순탄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조정에서는 중앙과 지방관청 등이 화폐를 남발하는 것을 우려하여 주조 기간을 제한하였지만, 이것이 잘 지켜지지 않아 화폐 가치가 폭락하기도 하였다. 반대로 영조 연간에는 주전(鑄錢)을 하지 않거나, 주전 양을 줄이면서 동전의 가치가 폭등하는 전황(錢荒)을 겪기도 하였다. 동전의 원료가 오르자 불법 주조 행위가 성행하여 동전의 품질이 조악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조정에서는 동전을 유통시켜서 재정 수입을 늘리고, 동전 원료 공급난에 따른 화폐 유통량 부족을 해소하기 위하여 중국 동전[唐錢]을 수입하자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중국 동전을 싼값으로 수입하여 유통시킬 경우 국내에서 동전을 주조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1792년(정조 16)에는 청으로 가는 역관을 통하여 당전을 무역하기 위한 세부 지침인 절목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원유한, 『조선후기 화폐사』, 혜안,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