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호(塔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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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릭 위에 입는 반소매의 포.

개설

답호는 철릭 위에 입는 반소매의 포였으나, 고종대에 이르러서는 주의 위에 입는 소매 없는 포가 되었다. 이처럼 시대에 따라 형태의 변화가 있었다. 또 전복(戰服) 제도는 바로 옛날의 반비의(半臂衣) 혹은 ‘작자(綽子)’라고 칭하기도 하였으며, ‘답호(搭護)’라고 칭하기도 했다는 것으로 보아 답호는 시대에 따라 명칭이 바뀌었다.

연원 및 변천

답호(塔胡)는 ‘답호(褡護)’ 또는 ‘답호(搭護)’ 등으로도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는 같은 옷을 시대에 따라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답호(塔胡)는 1522년(중종 17)까지, 답호(褡護)는 1796년(정조 20)에서 1919년까지, 답호(搭護)는 1884년(고종 21) 갑신의제개혁을 기준으로 1894년(고종 31)까지 나타난다.

답호는 겹답호와 솜을 넣은 유답호가 있으며, 색은 초록·남·대홍·유청 등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연향 및 거둥에 당상내관은 대홍답호를 입고, 당하내관은 품질에 관계없이 초록·남·유청 단자를 쓰라고 전교한 것으로 보아 신분에 따라 복색을 구분하였음을 알 수 있다(『연산군일기』 11년 4월 10일).

답호의 착용 순서를 보면 철릭 위에 답호를 입고 그 위에 단령을 입었으며, 옷 길이에 차등을 두었다. 따라서 철릭을 가장 짧게 만들고, 다음으로 답호와 단령을 조금씩 길게 하여 답호의 주름이 단령 밖으로 드러나게 만들었다(『연산군일기』 11년 6월 25일).

중종대에는 예조에서 복식 제도를 알리면서 근래 사치가 심하므로 동서반 정직 외에는 백저포로 답호 만드는 것을 금하자고 하였고(『중종실록』 17년 8월 12일), 광해군대에는 사치스러운 풍습이 날로 더욱 극심하여 당하관이 청초로 된 답호를 입는데, 이것은 전에 못 보던 것으로 근래에는 입는 사람이 많으니 지금 금하지 않으면 그 조짐이 장차 능단을 입는 데 이르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광해군일기』 4년 4월 21일). 이런 사례로 보아 답호를 만드는 소재가 신분을 구분하는 조건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답호의 색으로도 신분을 구분하였는데, 국조의 옛 제도에 당상관은 자색(紫色)을 입고, 당하관은 비색(緋色)을 입었다고 하였다(『정조실록』 20년 3월 29일).

한편 고종은 조복(朝服), 제복(祭服), 상복(喪服) 외에 직령도포를 비롯하여 소매가 넓은 옷들은 다 없애 버리는 대신 소매가 좁은 긴 도포를 입으며, 관리로 있는 사람은 전복을 더 입을 것을 명하였는데, 그때 입은 전복을 답호라고 부르라고 했다(『고종실록』 25년 10월 28일). 관리들의 의복 문제에 대해서도 중앙과 지방의 관리로 하관이 상관을 만나는 경우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정복을 입고 사적으로 만날 때에는 답호를 입도록 하였다(『고종실록』 31년 8월 12일). 그러나 다시 조령을 내려 사적인 자리에서는 답호를 없애도록 하였는데(『고종실록』 32년 3월 29일), 이는 관리와 백성 사이의 차별을 없애고자 한 것이다(『고종실록』 32년 4월 5일). 그러나 또 다시 통상 복색은 편리한 대로 주의(周衣), 답호, 사대(絲帶) 차림을 하되 내관과 외관의 관리가 출근할 때에는 구애 없이 입으며, 진현할 때에는 입지 않도록 했다(『고종실록』 32년 8월 10일). 이 모든 조치는 사치를 금지하고자 하는 조례로서 칙임관·주임관 및 30결 이상의 납세인은 무늬 있는 비단 답호를 입고, 판임관 및 10결 이상 납세인은 무명답호를 입도록 했다(『고종실록』 37년 11월 16일).

형태

답호는 철릭 위에 입는 직령포로 소매가 짧아 반비의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1888년(고종 25) 전복을 답호라고 부르도록 한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에는 답호에 소매가 달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