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공원(達城公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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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에 대구의 한국인과 일본인 거류민회가 청일전쟁 당시 야전지로 사용되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달성토성에 조성한 공원.

개설

달성(達城)은 청동기시대 이래로 이 지방의 중심 세력을 이루고 있던 집단들이 그들의 생활 근거지에 쌓은 성곽이라고 여겨진다. 1596년에 석축을 더하고 상주에 있던 경상감영을 현재의 경상감영공원 자리로 이전하기까지 이곳에 두었다. 달성공원(達城公園)은 대대로 달성서씨의 세거지였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야진지(野陣地)로 사용된 적이 있었고, 러일전쟁 당시에는 대구 거주 일본인들의 피난처로 이용되었다. 일본인들의 주도로 1905년 공원으로 지정되었으나 관찰사이용익이 뽕나무밭으로 개간하며 방해하자, 이사청 부이사관의 지원을 받은 일본인 거류민회가 달성공원기성회를 조직했다. 1908년 11월부터 공사를 시작했고, 면적은 현재와 비슷한 3만 9,000여 평에 달했다.

위치 및 용도

현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공원로 35에 위치하며, 기념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변천 및 현황

대구는 신라 때 달구화현(達句火縣)이라 불렸으며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 이르러 비로소 대구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달성이란 이름은 이 달구화(達句火) 달불성(達弗城)에서 유래되었다. 달성은 경주의 월성(月城)처럼 평지에 있는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축성한 것이 특징이다. 달성은 청동기시대 이래로 이 지방의 중심 세력을 이루고 있던 집단들이 그들의 생활 근거지에 쌓은 성곽이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성벽의 아래층에는 조개무지 유적이 있고 목책(木柵)의 흔적도 있다. 따라서 달성은 우리나라 성곽 발달사상 가장 이른 시기에 나타난 형식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고, 다양한 선사시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삼국사기』에는 261년(신라 첨해왕 15)에 달벌성을 쌓고 나마극종(奈麻克宗)을 성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에 합병된 뒤에는 군사 요지로 중시되었으며 그 후 1390년(고려 공양왕 2) 토성에 석축을 더했다. 1596년(선조 29)에 석축을 더하고 상주에 있던 경상감영을 현재의 경상감영공원 자리로 이전하기까지 이곳에 두었다. 성벽은 주로 흙으로 축조되었고 주위 길이는 약 1,300m, 높이는 4m 안팎이다.

달성공원은 또한 대대로 달성서씨의 세거지(世居地)였다. 세종 때 달성의 지형이 “주위가 천연적으로 높은 성벽을 이루고 있다.” 하여 경상도 지역 요새로 편입하고 남산고욕기(전 남산병원 일대)와 바꿔주겠다 했는데, 달성서씨 문중에서는 이 토지를 국가에 헌납했다. 세종이 이를 포상하려 하자 구계(龜溪)서침(徐沈)은 그 대신 국가에서 서민의 환곡을 탕감해줄 것을 건의하였고, 이에 따라 대구의 상환 모곡은 100석당 5승씩 감면케 되었으며 조선말까지 그 특례가 존속되었다. 대구부민은 이와 같은 서침을 기려 1665년 대구 구암서원에 봉향하였다. 한편 세종은 회화나무를 심어 서침의 마음을 기리게 했는데 현재 달성공원 내에 있는 서침나무가 그 나무로 알려져 있다.

달성공원은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야진지로 사용된 적이 있었고, 러일전쟁 당시에도 대구 거주 일본인들의 피난처로 이용되기도 했다. 1905년에 우여곡절 끝에 공원으로 지정되었다. 1930년 『별건곤』 제33호의 기사 「대구대구대구, 연혁 명승고적」에 의하면, 일본인들이 당시 공원 조성에 나섰던 이유는 청일전쟁 당시 야전지로 사용되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한다. 『대구일반(大邱一般)』(1912)에 이 과정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일본인 거류민회가 일공원과 신사 건립을 추진하자 1905년 4월 당시 관찰사이용익이 서병조(徐丙朝)를 시켜 뽕나무밭으로 개간하며 이를 방해했다. 그러자 일본거류민회 부회장 도쿠라 주로쿠[戶倉十六]는 수비대장 히다카[日高] 대위를 움직여 이용익과 담판을 시도했고, 그 결과 한국인과 일본인이 공동으로 공원을 조성하기로 했다. 뽕나무밭 개간도 중지되었다. 1906년 11월 25일에는 오카모토 리헤이[岡本利平] 부이사관의 지원을 받아 이와세 시즈카[岩瀨靜] 등이 주도하여 달성공원기성회를 조직했다. 1907년 1월 나카오지[中大路] 이사관이 부임하면서 달성공원 조성을 지원하였고, 같은 해 4월부터 한국인 및 일본인 유지의 갹금(醵金)을 모아 1908년 11월부터 공사를 시작했다. 이때 달성공원 조성 공사에 투입된 자금은 총 7,400~7,500원 정도였다고 하며 주로 기부금에 의해 충당되었다. 당시 면적은 현재와 비슷한 3만 9,000여 평 정도였다. 순종황제가 남행 당시, 1909년 1월 12일, 대구를 방문하였을 때 달성공원에서 각 학교 학생들의 집합 운동을 관람하기도 했다(『순종실록』 2년 1월 12일).

그런데 달성공원 조성은 사실 대구신사의 건립과 세트로 이해되어야 한다. 일본인들은 일찍부터 자신들의 황조(皇祖)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요배전(遙拜殿), 즉 대구신사 건립 부지로 달성산에 주목했다. 1905년 11월에는 대구신사 건립이 공인되었고, 1906년 5월 헌금 모집에 착수함과 동시에 당시 군수이자 관찰사서리였던 박중양을 통해 건립 부지에 대한 공식 허가를 받았다. 1907년 4월부터 한국인과 일본인 유지들로부터 거두어들인 갹금으로 1908년 11월부터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대구신사에 대한 공식적인 허가는 이로부터 한참 뒤인 1916년 4월 22일 『조선총독부관보』에서 확인된다. 1941년 일본에서 발간한 『흥아일본건국사』 제5권에 의하면, 조선인 김용주(金龍周, 창씨명 金田龍周)가 2,000원을 기부했다.

달성공원은 1963년 사적 제62호로 지정되었다. 이어 1965년 2월 달성공원 종합조성계획을 확정한 후 1969년 공원으로 탈바꿈시켰고, 1970년 5월 달성공원 종합문화관, 동물원 조성을 완료하고, 공원 내에 이상화 시비, 관풍루, 천도교 최제우 동상을 안치하였다.

참고문헌

  • 『조선총독부관보(朝鮮總督府官報)』1916년 4월 26일자 .
  • 白基萬, 「大邱大邱大邱, 沿革 名勝古跡」, 『별건곤』 제33호, 1930.
  • 伽藍康裕 編, 『興亜日本建国史』 제5권, 日本同盟通信社, 1941.
  • 三輪如鐵, 『大邱一般』, 玉村書店, 1912.
  • ‘달성공원의 유래’, 달성공원관리사무소 홈페이지, http://www.daegu.go.kr/Dalseong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