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문(端陽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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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의 살림을 맡아보는 여러 부서가 모여 있는 권역의 정문.

개설

단양문(端陽門)이 있는 권역에는 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왕실에서 꼭 필요한 살림살이를 맡아보는 부서가 차례로 자리했다. 단양문의 서쪽에는 사옹원에서 식자재를 맡아 관리하는 곳인 공상청, 문서의 기록과 관리를 맡아보는 벼슬아치가 머무는 서리방, 궁궐의 음식을 담당하는 사옹원의 다른 말인 주원, 활과 활촉을 담당하던 궁방, 말단 서리(胥吏)들이 머물던 장방이 차례로 놓여 있었다. 단양문의 동쪽에는 높은 마루로 된 곳간인 누상고, 액정서에 속해 왕명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던 사알이 머무는 사알방, 행랑채 곳간인 상고, 왕실의 음식을 담당한 수라간, 궁궐의 불을 밝히는 등촉방과 대은원 그리고 내시부의 다른 말인 내반원 등이 차례로 자리했다. 이처럼 왕실의 살림을 맡아하는 부서들이 모여 있는 단양문 안의 각 공간은 인정전과 선정전의 근처에서 왕의 일상을 쉼 없이 보좌하는 권역이었다.

위치 및 용도

단양문은 인정전의 동쪽, 선정전의 남쪽에 위치했고, 궁궐의 살림살이를 하는 수많은 관리가 드나들던 문이었다.

변천 및 현황

『조선왕조실록』에는 단양문에 관한 첫 기록이 영조대에 왕비의 발인을 단양문 밖에서 왕이 바라보며 곡하였다는 기사로 처음 나오지만, 창덕궁이 창건되던 태종대에 함께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영조실록』 33년 6월 3일).

창덕궁과 부침을 같이하며 재건되고 수보되었던 단양문은 1900년대 초까지 존재했으나 일제강점기에 창덕궁이 훼손되고 변형되면서 사라져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문이다.

형태

단양문은 행각 사이에 있는 평문의 형태인데, 「동궐도」 상에서는 문짝이 표현되지 않은 일각문으로 보인다. 도상에 문짝을 표현하지 않은 것은 문을 열어두었다는 표시일 것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단양문은 궁궐의 외부와 통하는 돈화문과 단봉문의 가까이에 있어 대내로 들어가기 쉬운 위치에 있었다. 궁궐의 공간 배치와 지리를 모르는 외부인이 돈화문의 주변 협문으로 잠입해 들어오면 제일 먼저 맞닥트리는 문이었다. 이 때문에 단봉문에는 뜬금없는 난입이 자주 일어났다. 이뿐만 아니라 단봉문 안에 있는 각 부서들의 특성상 하급 관리, 물건을 운송하는 사람 등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드나들며 궁궐을 어지럽히기도 하였다.

정조대에 왕실 안에 경사가 있어 산실청을 차리게 되었는데 대비들이 염려하자 궁궐 안이 더럽혀지지 않게 철저한 문단속을 명하였다. 정조는 궁궐의 특성상 잡인이 들어오지 않을 수 없으니 그들을 속박하고 견디기 힘들 만큼 조이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면서도 단양문은 마지막 경계로 삼아 그 안으로는 잡인의 출입을 금하도록 하였다. 단양문 안에는 오정고(午正鼓)라 하는 한낮을 알리는 북이 있었는데 난입한 자들이 이 북을 치며 억울한 일을 하소하는 일이 잦았다. 또한 궁궐을 돌보며 잡일을 하는 자들이 머무는 곳이어서 직무에 충실한 낭청들이 도에 넘는 책임감으로 심한 매질을 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위치상 인정전 영역은 물론 선정전의 합문과 가까운 곳이어서 이러한 사건들이 논란이 되곤 하는 경우가 있었던 문이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