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원(樓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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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경기도 양주에 위치하여 공무 여행자 및 일반 행인들에게 숙박을 제공하던 공립 여관.

개설

조선시대에는 공무 여행자나 일반 나그네에게 숙박을 제공하기 위해 주요 도로변에 원(院)을 건립하여 운영하였다. 원은 교통의 요지뿐 아니라 인적이 드문 산간 계곡이나 역참이 설치되지 않은 곳에도 건립되었다.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전국에 설치된 원은 한성부 4곳, 개성부 6곳, 경기도 114곳, 충청도 209곳, 경상도 468곳, 전라도 251곳, 황해도 76곳, 강원도 64곳, 평안도 80곳, 함경도 37곳 등 총 1,309곳이었다. 그 중에서도 경기도 양주에 위치한 누원(樓院)은 조선시대 후기에 누원점(樓院店)으로 발전하여 물류 유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누원의 오늘날 위치는 서울시 도봉구 도봉동과 의정부시 경계에 해당한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누원의 설립에 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심지어 누원이라는 명칭은 『세종실록』「지리지」와 『여지도서(輿地圖書)』, 『대동지지(大東地志)』, 『경기도읍지(京畿道邑誌)』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주목 역원 조에는, "도봉산 밑에 해촌(海村)이라는 언덕이 있고 덕해(德海)라는 원(院)이 있는데, 서울과의 거리가 30리이다."라고 되어 있다. 또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잔 들고 누(樓)에 올라 한 번 웃었다. 수없이 푸른 산이 뾰족하게 무더기를 이루었네"라는 구절이 있는데, 누원에 올라 도봉산을 바라보며 지은 시로 짐작된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으로 종합해볼 때 해촌이라는 곳에 있었다는 덕해원이 누원의 원래 명칭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누원이라는 명칭이 『조선왕조실록』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선조 때이다. 1596년(선조 29)에 영호남과 해서 및 관서 지방의 관방(關防)에 관해 논의하던 중, 특진관신잡(申磼)은 경기도 광주는 광진(廣津)으로 옮기고 양주는 누원(樓院)으로 옮겨 경성을 호위하도록 하자고 주장하였다(『선조실록』 29년 3월 8일). 당시에 누원이 관방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원은 중로·소로의 운영난, 주막의 발달 등의 이유로 크게 쇠퇴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1,309곳에 설치되었던 원이 『여지도서』에는 162곳만 남았으며, 「대동여지도」에서는 88곳만 존속하고 있다. 그 대신 주막 또는 주점이 점차 발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누원 또한 누원점(樓院店)으로 점차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즉 누원은 점차 동북 지방에서 한양으로 유입되는 북어와 북포(北布) 등의 물류 공급지 역할을 함으로써 점촌(店村)으로서 크게 발달하였다.

조직 및 역할

원에는 원주(院主)를 임명하여 원우(院宇)를 짓거나 수리하며 관리하게 하였다. 원우의 규모는 여행객의 빈도와 교통의 중요성에 따라 달랐는데, 홍제원(弘濟院) 같은 경우 중국 사신이 왕래하면서 유숙하는 곳이어서 많은 부속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충청도 신혜원(新惠院)의 경우에는 안채, 바깥채 및 주방과 마방 등이 있었으며, 누각과 정자도 건립되어 있었다. 안채는 온돌방·부엌·대청·광으로 구성되었으며, 바깥채는 대청에 식당 겸 술청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누원에 어떤 건물이 세워졌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누원(樓院)’이라는 명칭으로 미루어 누각 같은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다른 원과 마찬가지로 안채, 바깥채와 대청, 마방 등이 건립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변천

조선시대 누원은 덕해원에서 유래된 것으로, 공무로 여행하는 관리나 일반 행인들을 위한 숙박 시설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누원이 누원점으로 발전할 무렵에는, 관방을 누원으로 옮기자는 주장이 제기된 점, 별장(別將)을 파견하여 누원점을 지키게 한 점(『영조실록』 4년 3월 20일) 등으로 미루어 군막(軍幕)을 포함한 군사 시설이 추가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호인(胡人)들의 집단 거주지로 발전하면서(『선조실록』 35년 1월 8일) 누원점에는 상당하게 많은 민가나 상가가 설립되어, 일종의 점촌을 형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1792년(정조 16)에 정조가 선릉(宣陵)이나 광릉(光陵)을 참배하고 환궁할 때, 누원 주정소(晝停所)에 이르러 누원점의 백성들을 불러 어려운 점을 묻고 촌점민들의 생계에 관심을 기울인 데서 알 수 있다(『정조실록』 16년 9월 12일).

이처럼 조선시대 초기의 누원이 공공 여행자나 행인을 위한 여관으로서의 기능을 하였으나,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누원점으로 바뀐 뒤에는 함경도 지방에서 한양으로 유입되는 북어나 북포 등의 물산을 유통시키는 집산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밖에 외적을 침입을 막고 명화적 같은 적도들을 검문하는 관방 역할도 담당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 『경기도읍지(京畿道邑誌)』
  • 최영준, 『영남대로』,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0.
  • 김종헌, 「조선시대 교통건축으로서의 院宇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7-4, 1998.
  • 박재덕, 「한국 전통숙박시설의 변천에 관한 연구-조선시대의 院을 중심으로-」, 경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4.
  • 최완기, 「조선후기 樓院店의 경제적 입지」, 『한국사학보』7, 1999.
  • 최재경, 「조선시대 院에 대하여」, 『영남사학』4,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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