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창(弄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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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지역에서 전습되어 내려오는 독특한 창술로서 관서 지방 무과 시취에서 행해지던 것.

개설

농창(弄槍)은 평양 지역에서 전습되어 내려오는 독특한 창술로서 말 위에서 창을 사용하는 기창(騎槍)의 일종이다. 관서 지방 무과 시취에서 행해졌다.

연원 및 변천

1792년(정조 16) 평양감사홍양호(洪良浩)가 도내의 무사를 시취하고 이를 보고한 장계 및 전교의 등본인 『관서무사시취방(關西武士試取榜)』에는 농창이라는 창술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농창은 평양 지역에서 볼 수 있는데 관서 지방의 시취에서는 중앙 정부에서 행해진 창술로 응시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 점이 특이하다. 이는 각 지역에서 독특한 창술이 발전했던 까닭에 그 지역 사람들이 익숙한 기예를 가지고 시험을 본 데서 기인한 것이다.

농창의 명칭은 조선전기 기록에서도 나타난다.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태종 때이다. 1416년(태종 16) 7월에는 기사(騎射)·보사(步射)·무경(武經) 등과 함께(『태종실록』 16년 7월 8일), 같은 해 8월에는 보사·기사 등과 함께 농창이 나타나고 있어(『태종실록』 16년 8월 2일), 무재시취(武才試取) 과목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평상시의 취재(取才) 및 무과(武科)에서 기사·보사·격구(擊毬)·농창 등에서 재주와 힘이 넉넉하여 갑옷을 입고 시험하기를 자원하는 자에게도 허락하여 말[馬]과 손[手]이 함께 빠른 자에게는 역시 각각 갑절로 분수(分數)를 주게 하소서”(『세종실록』 23년 10월 4일)라는 구절과 “농창에는 말과 손이 모두 빠르고, 형세가 갖추어져 세 번 맞힌 자는 도(到) 30을 주고”(『세종실록』 25년 7월 5일)라는 구절을 통하여 조선전기에 나타나는 농창이라는 용어는 말 위에서 창을 사용하는 기예임을 알 수 있다.

농창이 평양 지역에서 전습될 수 있었던 까닭은 임진왜란 이후 평양에 진정창법(眞定槍法)과 절강창법(浙江槍法) 등의 다양한 창술이 전습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관서무사시취방(關西武士試取榜)』
  • 『대전회통(大典會通)』
  •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 허인욱, 「『關西武士試取榜』의 弄槍과 梨花槍」, 『체육사학회지』13, 2004.
  • 허인욱, 「金加勿을 중심으로 살펴본 조선전기 槍術」, 『무도연구소지』20,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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