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둔도(鹿屯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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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북도 경흥도호부의 조산보에 속한 두만강 입구에 있는 섬.

개설

녹둔도는 안쪽 10여 리에 목책(木柵)이 설치되어 있었다. 선조대에는 둔전(屯田)을 설치하였다. 현재 녹둔도는 육지화되었으며, 함경북도 경흥군 노서면에 속한다.

위치 및 용도

녹둔도는 조산보에서 동쪽으로 5리쯤 떨어져 있는 섬이다. 경흥부로부터 남쪽 56리(약 22㎞)에 위치해 있다. 녹둔도의 토지는 비옥하여 조산보에 속한 백성이 배를 타고 섬에 들어가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방어가 쉽지 않아 조선 조정에서는 녹둔도에서의 경작을 금하기도 했다.

변천 및 현황

녹둔도는 세종의 6진 개척 이후 조선의 영토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녹둔도는 들판이 100여 리가 될 정도로 넓었으며, 전답 역시 기름졌다. 그래서 백성이 3월 초하루가 되면 섬에 들어가서 농사를 짓고, 10월 초하루에는 다시 조산보로 돌아왔다. 해마다 풍년이 들어 변경 지역 군사들의 식량이 넉넉했다고 한다.

녹둔도는 두만강 너머의 골간(骨看) 올적합(兀狄哈)의 침입에 항상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세조가 즉위한 때에도 녹둔도와 인근의 조산구자(造山口子)의 방어를 더욱 엄격하게 할 것을 주문한 바 있다(『세조실록』 1년 8월 10일).

성종대에는 봄이 되면 조산(造山)의 군사와 백성이 녹둔도에 들어가 농사짓고, 수확을 하고 난 후 조산보로 다시 돌아와 방수(防守)하였다. 조산보에서 녹둔도로 나가려면 반드시 배를 타야만 했는데, 매우 고생스러워 백성이 차라리 녹둔도에 거주하면서 방수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조정은 이러한 요구에 쉽게 응할 수 없었는데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녹둔도에는 진흙이 없어 보(堡)의 성벽을 쌓을 때 풀이나 지푸라기를 쓰고 모래와 그것을 섞어서 바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바람이 불거나 큰비가 내리면 보의 성벽이 사라져버렸다. 때문에 만약에 발생할 수 있는 변란에 대비하기에는 녹둔도의 여건이 좋지 못했다. 홍수라도 나면 물에 떠내려갈 수도 있었기 때문에 조산의 백성을 녹둔도로 이주시키는 것은 불가했던 것이다(『성종실록』 17년 2월 22일).

1509년(중종 4)에는 실제로 녹둔도의 이러한 사정 때문에, 녹둔도에서의 경작을 금하는 게 좋겠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녹둔도가 비록 경작하기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조산보를 지키는 군졸이 모두 수군이어서 만약 적이 녹둔도를 쳐들어온다면 그들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중종실록』 4년 4월 29일).

1510년(중종 5) 3월에는 좌의정유순정(柳順汀)이 다시 한 번 녹둔도의 경작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는 야인이 녹둔도로 건너오는 길은 물이 깊어 왕래하기 어렵고, 조선 측에서 건너갈 때에는 물이 얕아 다니기가 쉽다고 하였다. 때문에 경작을 재개하고, 백성이 녹둔도에서 경작할 때만 조산보만호가 녹둔도로 보를 옮겨 이들을 보호해준다면 충분히 경작이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또한 이를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서 함경도관찰사인 고형산(高荊山)으로 하여금 조산보를 녹둔도로 옮기는 일 및 농사지을 때 방어하는 일에 대해 판단하도록 여지를 두었다(『중종실록』 5년 3월 5일).

녹둔도에서 경계했던 야인은 골간 올적합이었는데, 점차 바닷가에 거주하는 종족이 많아졌다. 또한 그들은 배를 익숙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녹둔도 및 조산보는 항상 염려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중종실록』 9년 10월 13일). 이처럼 녹둔도에서의 경작과 방어하는 것에 허락과 금지는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1583년(선조 16)에는 함경도감사정언신(鄭彦信)에 의해 녹둔도에 처음으로 둔전을 설치하였다. 군량미 부족 사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1586년(선조 19)에는 선전관김경눌(金景訥)이 녹둔도둔전관(鹿屯島屯田官)으로 왔는데, 그는 녹둔도 가운데에 목책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남도의 군역에서 빠진 군병을 농부로 예속시켜 개간하고 씨를 뿌리며 작물을 심게 했다.

다음 해인 1587년(선조 20)에는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이순신(李舜臣)으로 하여금 녹둔도의 둔전을 담당하게 했다. 같은 해 9월 24일 부사이경록(李景祿)이 일꾼인 연호군(煙戶軍)을 데려다가 수확하려고 할 때 올적합이 녹둔도를 침범하여 사람들을 잡아가고 가축들을 약탈해 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녹둔도 접전에서 전사한 자는 수호장오형(吳亨)과 감타관(監打官)임경번(林景藩) 등 11인이며, 올적합의 포로가 된 자의 수는 160여 명으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참혹한 소식을 접한 선조는 매우 원통해하였으며, 특히 그들에게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포로들을 찾아오라고 명하였다(『선조실록』 20년 10월 4일)(『선조실록』 20년 11월 21일)(『선조실록』 20년 12월 26일). 이 사건으로 녹둔도의 둔전 경영은 취소되고, 당시 조산보만호이순신은 백의종군하게 되었다(『선조수정실록』 20년 9월 1일).

이와 함께 선조는 북변사(北邊使)이일(李鎰)에게 명하여 1588년(선조 21) 1월 14일 녹둔도를 침략한 시전(時錢) 부락을 정벌하도록 했다. 함경도의 토병(土兵) 및 경장사(京將士) 2,500여 명을 그곳으로 보냈는데, 올적합의 장막 200여 좌(坐)를 불 지르고, 머리 380여 급(級), 말 9필, 소 20마리를 획득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조선의 군대는 아무런 피해가 없이 모두 무사히 돌아왔는데, 이때 백의종군했던 이순신은 크게 공을 세워 백의종군의 처벌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선조실록』 21년 1월 27일) (『선조수정실록』 20년 9월 1일).

형태

녹둔도 가운데에 목책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전해지나, 크기는 알 수 없다.

참고문헌

  • 『제승방략(制勝方略)』
  • 『북정일록(北征日錄)』
  • 『백사집(白沙集)』
  • 『여지도서(輿地圖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