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직(盧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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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36년(중종 31)∼1587년(선조 20) = 52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호조 판서(判書)⋅예조 판서(判書)이고, 시호(諡號)는 헌민(憲敏)이다. 자(字)는 사치(士稚)이고, 호(號)는 망포(望浦), 또는 별유(別宥)⋅호폐헌(好閉軒)이다. 본관은 교하(交河)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현감(縣監)노홍우(盧弘祐)이고, 어머니 안동김씨(安東金氏)는 대사헌(大司憲)김희수(金希壽)의 딸이다. 월사(月沙) 이원익(李元翼)⋅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난곡(蘭谷) 강서(姜緖) 등과 가깝게 교유하였다.

명종 시대 활동

1558년(명종 13)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3세였다.[<사마방목>]

선조 시대 활동

1569년(선조 2) 알성(謁聖) 문과에 갑과(甲科) 1등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4세였다.[<문과방목>] 그 뒤에 형조 좌랑(佐郎)에 임명되었는데, 형옥(刑獄)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여 형옥을 잘 처리하였으므로, 선조의 신임을 얻어서, 청요직(淸要職)에 올랐다.

1573년(선조 6)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가, 1574년(선조 7) 예문관 제학(提學)이 되었다.

1576년(선조 9)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다가,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고,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1582년(선조 15) 평안도 관찰사(觀察使)로 나갔다가, 1585년(선조 18)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고, 뒤이어 호조 판서(判書)를 거쳐, 예조 판서가 되었다.

1586년(선조 19) 시약청 제조(提調)가 되어, 내의원을 관리하였다. 노직이 병으로 벼슬을 사임하자, 선조가 한직인 중추부 지사(知事)에 임명하였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강직하여 엄격하였다. 간사한 아전들을 엄하게 다스리고 관리들의 기강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였다. 또 정사(政事)에 밝아서, 승정원 동부승지로 있을 때 선조가 해당 승지[色承旨]를 부르지 않고 모든 일을 동부승지노직에게 맡겨서 처리하도록 하였다.

1604년(선조 37) 1월에 홍여순(洪汝淳)을 형조 판서로, 신잡(申磼)을 중추부 지사(知事)로 임명하였는데, 사관(史官)이 논평하기를, “두 사람은 추잡하고 욕심이 많았으며, 임금의 뜻을 잘 받들어 지위가 정경(正卿)에 이르렀는데, 뇌물이 그들의 대문 앞에 가득 차서 벼슬을 팔아먹는다는 비방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탐오한 재상을 「홍(洪)⋅신(申)⋅노(盧)」라고 일컬었는데, 홍여순과 신잡과 죽은 노직(盧稙)을 말한다.”고 하였다.[『선조실록』 37년 1월 23일] 당시 사관(史官)들은 서인(西人)이었으므로, 반대파를 욕하고,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 헐뜯었던 것이다.

부인과 후손

부인 박씨(朴氏)는 박간(朴諫)의 딸이다.[<방목>] 양자 노즉준(盧卽俊)는 별좌(別坐)를 지냈다.[족보]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구전집(苟全集)』
  • 『귀록집(歸鹿集)』
  • 『동명집(東溟集)』
  • 『미암집(眉巖集)』
  • 『사류재집(四留齋集)』
  • 『상촌고(象村稿)』
  • 『석담일기(石潭日記)』
  • 『석탄집(石灘集)』
  • 『송당집(松塘集)』
  • 『율곡전서(栗谷全書)』
  • 『은봉전서(隱峯全書)』
  • 『중봉집(重峰集)』
  • 『학봉전집(鶴峯全集)』
  • 『홍재전서(弘齋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