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의(內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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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내의원에 소속된 의녀(醫女).

개설

내의(內醫)는 내의녀(內醫女)라고도 하는데, 의녀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이었다. 간병의(看病醫)가 활동 기간을 거치면서 뛰어난 실력을 보이면 내의녀가 되었다. 내의녀는 간병의 중에서 2명을 선택하여 임명하였다. 내의녀가 되어야 비로소 매달 급료를 받을 수 있었다.

담당 직무

내의는 의녀 가운데 가장 의술이 뛰어난 의녀로 왕을 비롯하여 왕실 구성원들의 건강을 돌보는 일을 담당하였다. 1478년(성종 9년)에 예조에서 의녀권과조(醫女勸課條)에 대해 아뢴 내용에 의하면 “의녀를 3등으로 나누되, 첫째 내의라 하여 2인을 두고 달마다 급료를 주며, 둘째 간병의라 하여 20인을 두고 전달에 강(講)한 점수[畫]가 많은 자 4인에게 급료를 주며, 셋째 초학의(初學醫)라 한다.”고 하여 의녀의 등급을 3단계로 구분하였다(『성종실록』 9년 2월 16일).

내의는 그 밖에도 조선시대 궁중에서 의약을 담당했던 내의원(內醫院), 즉 내국(內局)·내약방(內藥房)·약원(藥院) 등을 일컫거나, 조선시대 내의원에 소속된 의관(醫官) 가운데 당하관을 이르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

변천

내의녀로 유명한 인물로는 중종의 병 수발을 들었던 대장금(大長今)과 은비(銀非)를 비롯하여 선조대 애종(愛鍾) 등을 들 수 있다.

1788년(정조 12) 10월 3일에 각 궁방(宮房)의 무수리[水賜里]·내의녀·침선비(針線婢)와 각 영(營)·읍(邑)의 기녀들의 머리 모양과 그 위에 가리마를 덮어 등위(等威)를 구별할 때 내의녀는 종전대로 모단(冒緞)을 사용하게 하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의 단행으로 조선의 보건 의료 제도를 개혁하였다. 새로운 의학 교육을 시작한 이후 간호부 양성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의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고, 내의녀도 없어졌다.

참고문헌

  • 한희숙, 『팔방미인 조선 여의사 의녀』, 문학동네, 2012.
  • 박선미, 「조선시대 의녀교육연구―그 양성과 활동을 중심으로」,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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