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속고치(內速古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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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 겁설관(怯薛官) 중 하나.

개설

고려후기 국왕의 호위와 잡무를 담당하던 관원인 겁설관 중 하나였다. 겁설이란 은혜, 은총, 당번이란 뜻을 지닌 몽골어 케식([怯薛], kesig)의 한어 표기이다.

담당 직무

고려후기 겁설관으로 홀치[忽赤], 우달적(迂達赤), 속고치[速古赤], 조라치[詔羅赤], 팔가치[八加赤] 등이 설치되었는데, 이들은 주로 궁궐의 숙위, 왕의 의복, 여행 등에 관한 업무 및 각종 잡무를 수행하였다. 특히 속고치는 왕실의 의복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였다. 내외(內外)의 직(職)이 있었다.

변천

몽골제국에는 케식이란 호위군이 있었는데 창설 초기에는 모두 550명이었지만 점차 수가 늘어나면서 몽골 군대의 중심이 되었다. 쿠빌라이 때에 와서 12,000명에 달하였다. 케식은 시위인 투르가우드(turqa’ud), 숙위인 헵테울(kebte’ul), 궁수인 호르치(qorči) 등 세 부대로 구성되었다. 케식은 일반적으로 대칸을 호위하는 것 외에도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고려는 몽골제국의 케식 제도를 받아들여 관직을 새로 설치하였다.

속고치는 몽골어 수구르치(sigürči)에서 유래하였다. 수구르치는 몽골어로 ‘양산을 가진 사람’이란 뜻이며 황제 측근에 양산을 들어 햇빛을 막아주던 관직이었던 듯하다. 또한 몽골어에는 ‘빗자루’를 뜻하는 비슷한 발음으로 불리는 단어가 있다. 『원사(元史)』에 의하면 황제의 의복에 대한 업무를 담당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체로 황제의 의복과 장신구 등을 담당하던 관직으로 보인다.

속고치라는 관직은 조선초기에도 유지되었으며 이와 관련하여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내속고치[內速古赤]가 확인된다. “예조 판서변계량(卞季良)과 대언(代言) 등에게 면포와 마포를 줄 때 내속고치로서 근시하는 자도 모두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태종실록』 17년 7월 8일). 내속고치는 세종대 초까지 등장하다가(『세종실록』 4년 8월 29일) 이후 기록에는 따로 언급이 없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白鳥庫吉, 「高麗史に見えたる蒙古語の解釋」, 『東洋學報』 18-2, 1929.
  • Paul Pelliot, ‘Les mots mongols dans le Korye sa’, Journal Asiatique, 217-2, 1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