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발아한(浪孛兒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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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일대에 거주하는 올량합 추장으로, 세조대에 조선과 불화를 일으켜 참수된 인물.

개설

낭발아한은 두만강 일대에 거주하는 올량합(兀良哈) 추장이었다. 세종대부터 조선과 교류를 하였으나, 1458(세조 4) 상경 문제로 함경도절제사양정과 불화를 일으켰다가 1459년에 참수당하였다.

활동 사항

낭발아한은 두만강 일대의 추장으로, 1438년(세종 20) 이전에는 명의 관직인 모련위도지휘동지[毛燐衛都指揮同知]를 가지고 있었다. 1441년(세종 23)에 도만호(都萬戶)에 제수되면서 조선의 관직을 받았다. 그는 1454년(단종 2) 11월에 상경하여 조회하기 시작하였는데, 이해 12월에 정헌대부(正憲大夫)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제수되었다(『단종실록』 2년 12월 20일).

세조대에 들어서서는 여진인들을 상경시켜 조선의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후대하여 함경도 일대의 여진을 안정시키려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중에 하나가 올량합의 낭발아한이었다. 하지만 1458년에 들어서면, 낭발아한과 틈이 벌어졌다. 낭발아한 등 11명이 경성부에 와서 상경하고자 하였는데, 함경도도절제사양정(楊汀)이 5~6명만 거느리고 입조하게 하였던 것이다. 기분이 상한 낭발아한은 돌아간다는 말도 없이 가 버렸다(『세조실록』 4년 11월 27일). 낭발아한은 이 당시 서운한 마음을 직접 예조에 하소연하였다. 함경도의 도절제사가 여진인을 개돼지와 같이 대우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같은 해 12월에 상경한 낭발아한을 직접 세조가 대면하였는데, 세조는 변장에게 한 무례한 행동에 대하여 아들 낭이승거(浪伊升巨)를 보고 용서해 준다고 하며 마무리하고자 하였다(『세조실록』 4년 12월 12일).

하지만 낭발아한은 이에 대한 원망을 가지고 있었는지, 1459년(세조 5) 6월 신숙주가 세조의 지시를 받아 여진 세력 간의 화해를 주도하러 갔을 때, 병을 칭탁하면서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신숙주는 통사를 보내 그를 설득하였는데, 낭발아한의 족인들은 통사에게 화살을 겨누며 위협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정벌 의도가 의심된다는 말을 하면서 문제를 키웠다(『세조실록』 5년 6월 11일). 세조는 낭발아한 등이 무례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일일이 법으로 다스릴 수 없다며 이들을 진정시키도록 하였다. 이에 낭발아한은 함경도경차관(咸吉道敬差官)강효문(康孝文)을 만나 자신의 잘못을 해명하였고, 강효문은 통사에게 활을 겨눠 구속되었던 월랑가(月郞哥) 등을 석방하면서 마무리하였다(『세조실록』 5년 6월 11일).

하지만 낭발아한의 아들인 낭이승거의 처종형 최적(崔適)이 낭이승거가 휴가를 얻어 길주의 온천에 간다고 하였지만, 실은 명에 가려 한다는 말을 전하면서 상황이 돌변하였다. 세조는 근거 없는 소문으로 여진의 여러 부락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조선의 사자를 활로 쏘려 하였던 점, 신숙주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던 점, 아들 낭이승가와 함께 모반을 획책하였다는 사유를 조목으로 해서 낭발아한 부자와 족친들까지 참수형에 처하였다. 낭발아한 참수는 이후 명과의 외교문제로 비화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박정민, 「조선시대 여진인 내조(來朝) 연구」,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 이규철, 「조선초기의 대외정벌과 대명의식」, 가톨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 황선희, 「세조 초기의 여진관계와 북정(北征)」, 서강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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