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속면천(納粟免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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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량의 곡식을 납부한 노비를 천민 신분에서 해방시켜 양인이 되게 하는 일.

개설

노비가 납속(納贖)하여 천민의 신분을 면하는 일은 조선전기부터 있어 왔으나, 한시적으로 시행되거나 또는 특정 사안에 국한되었다. 조선중기 이후가 되면 진휼이 시급한 지역의 특정 노비를 대상으로 정해진 값을 내도록 하고 면천케 하거나, 국가 차원에서 면천첩을 판매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처럼 곡식을 내고 면천하게 하는 제도는 노비 신분의 해방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이 제도는 조선후기 노비 인구의 감소와 신분제 변동의 한 원인이 되었다.

내용 및 특징

노비 면천의 대상과 면천 가격

납속면천의 대상이 되는 노비는 공노비·사노비로서 제한은 없었다. 제도 시행 초기인 1467년(세조 13)에 이미 공노비·사노비의 납속면천이 허락되었으며, 이후에도 공·사노비 간에 차별 없이 시행되었다. 임진왜란 시기는 물론, 광해군대 궁궐 복구사업이 착수된 때나 인조대의 각종 군량·군마 모집 때도 공노비·사노비의 납속면천은 장려되었다.

사노비의 납속면천을 허락한 것은 공노비에 비하여 다소 부유한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성종대에 충청도 진천(鎭川)에 사는 사노비 임복(林福)은 쌀 3,000석을 내고 자신과 아들 4명의 신분을 양민으로 바꾸었다(『성종실록』 16년 8월 17일).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전라도 남평에 사는 사노비 가동(家同)도 2,000석을 내고 양민이 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사노비의 경우 그 주인 소유의 노비가 면천하게 되어 재산상의 손실이 예상되므로, 그에 따른 보상책이 따라야 했다. 납속하여 면천한 사노비의 주인에게는 공노비를 지급하거나 관직을 제수하기도 하였다.

한편, 공노비의 납속면천은 노비의 종류에 따라 그 경중이 달랐다. 공노비에는 내노비(內奴婢)·시노비(寺奴婢)·역노비(驛奴婢)·관노비(官奴婢) 등이 있었는데, 상대적으로 관노비의 납속면천이 어려웠다. 관노비의 납속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관노비와 지방관의 사적인 관계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관노비의 과중한 역을 대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지역적으로 보면 평안도·함경도 지역의 공노비가 납속면천의 기회가 많았다.

공노비·사노비의 납속가(納粟價)는 시기와 상황에 따라 차이가 컸다. 그 구체적 사례를 보면, 1467년(세조 13)의 경우 50석(石) 정도였으며, 역노비가 면천하여 역리(驛吏)가 되는 데는 30석 정도가 필요하였다. 1718년(숙종 44)의 경우 관서 지방 노비에 대해 평안도청북감진어사김운택(金雲澤)의 건의에 따라 진휼청이 정한 속량(贖良) 가격을 보면 15세에서 30세까지는 쌀 50석, 31세에서 40세까지는 쌀 40석, 41세에서 50세까지는 쌀 30석, 51세에서 55세까지는 쌀 20석, 56세에서 60세까지는 쌀 10석이었다(『숙종실록』 44년 1월 4일).

한편, 노비의 납속면천은 납속한 당사자에 한해 역(役)을 면하거나 신분이 양민으로 되는 것이었다. 여자 종의 경우 자신이 면천하여 양민이 되면 그 자손도 영구히 양민이 되었으므로, 여자 종의 면천을 꺼리는 경우도 있었다.

요컨대 납속면천은 경제력을 갖춘 노비가 양인으로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통로가 되었다. 국가 재정을 보충하고자 시행한 납속면천제가 결국 조선시대 공노비·사노비의 감소와 신분제 변동의 중요한 요인이 된 것이다.

변천

노비에 대한 납속면천은 이미 세조·성종대 시행되었지만,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군량의 확보, 영건사업에 따른 재원 조달, 진휼곡 마련에 수시로 활용되었다.

조선초기의 면천은 1467년(세조 13)에 처음 실시되었다. 당해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필요한 군수 물자를 조달하는 데 면천이 시행되었다. 화살·곡식을 운반하거나 개인의 곡식을 내는 공노비·사노비의 면천을 허락하였다. 이때 납속량은 대체로 쌀 50석 정도였다. 납속면천의 길이 열리자 공노비·사노비의 응모가 많았다(『세조실록』 13년 7월 4일).

이후 성종 때에 이르면, 노비의 납속면천은 노비 개별적 사안에 따라 허락되었다. 즉, 전국적 한재로 기근이 혹심했던 1485년(성종 16)에 왕은 3,000석을 거듭 납속한 진천 사노비 임복과 아들 4명에 대한 면천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2,000석을 내고 면천하고자 한 가동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납속면천에 지역적 제한을 두기도 하였다. 1553년(명종 8) 경상도·전라도의 기근으로 경상도·전라도의 공노비·사노비에 한해 납속면천을 허락한 경우가 그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공노비·사노비의 납속면천은 전면적으로 시행될 수밖에 없었다. 각종 공명첩과 함께 면천첩이 판매되었고 공노비·사노비를 가리지 않고 면천이 허용되었다. 이러한 납속면천제의 시행은 광해군대 영건사업에 따른 재원 마련, 인조대의 각종 전란과 진휼곡 확보, 현종 이후의 진휼곡 조달을 위하여 지속적으로 시행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이준구, 『조선 후기 신분 직역 변동 연구』, 일조각, 1993.
  • 전형택, 『조선 후기 노비 신분 연구』, 일조각, 1989.
  • 평목실, 『조선 후기 노비제 연구』, 지식산업사, 1982.
  • 문수홍, 「조선시대 납속제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6.
  • 서한교, 「조선 후기 납속 제도의 운영과 납속인의 실태」, 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