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치욱(南致勗)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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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남치욱 |
한글표제 | 남치욱 |
한자표제 | 南致勗 |
분야 | 인물 |
유형 | 무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중종~명종 |
집필자 | 최양규 |
자 | 욱지(勗之)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494년(성종 25) |
본관 | 의령(宜寧) |
주거지 | 서울[京] |
증조부 | 남지(南智); 좌의정 |
조부 | 남구(南俅); 간성군수(杆城郡守) |
부 | 남계(南悈); 충좌위(忠佐衛) 부사직(副司直), 부사과(副司果) |
모_외조 | 전의이씨(全義李氏); 대사헌(大司憲) 이서장(李恕長)의 딸 |
형제 | (동생) 남치근(南致勤): 무과(武科) 장원(壯元) 급제, 병조 참판(參判), 북병사(北兵使), 남병사(南兵使) |
처_장인 | 문화유씨(文化柳氏): 첨정(僉正) 유한평(柳漢平)의 딸 |
자녀 | (1자) 남언순(南彦純): 무과 장원 급제, 승지(承旨) (2자) 남언경(南彦經): 유일(遺逸), 이황(李滉) 문인, 이조 참의(參議), 전주부윤(全州府尹) (호)동강(東岡) (3자) 남언진(南彦縝): 진사(進士), 사평(司評) (4자) 남언기(南彦紀): 진사(進士), 별좌(別坐)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남치욱(南致勗) |
총론
[1494년(성종 25)~ 졸년 미상.] 조선 전기 중종~명종 때의 무신. 자(字)는 욱지(勗之)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충좌위(忠佐衛) 부사직(副司直)남계(南悈)이고, 어머니 전의이씨(全義李氏)는 대사헌(大司憲)이서장(李恕長)의 딸이다. 좌의정남지(南智)의 증손자이고, 북병사(北兵使)남치근(南致勤)의 형이다. 승지(承旨)남언순(南彦純)과 동강(東岡) 남언경(南彦經)의 아버지다.
중종 시대 활동
1528년(중종 23) 별시(別試) 무과에 갑과(甲科) 1등으로 장원(壯元)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5세였다.[<무과방목>] 그해에 동생 남치근(南致勤)도 식년(式年) 무과에 장원 급제하여, 사람들이 형제가 나란히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다고 감탄하였다.
1544년(중종 39) 김해부사(金海府使)에 임명되었는데, 그해 4월에 왜선 20여 척이 경상도 통영(統營) 진리(鎭里)에 있는 사량진(蛇梁鎭)에 침입하여 사람과 말을 약탈해 갔다. 이것이 이른바 <사량진 왜변(蛇梁鎭倭變)>이다. 같은 해 사헌부에서 경상도 병사(兵使)⋅수사(水使)와 함께 김해 부사도 아울러 추고(推考)할 것을 청하며, 아뢰기를, “김해(金海)는 거진(巨鎭)으로 방어에 가장 긴요한 곳인데, 부사남치욱은 재질과 역량이 그 소임을 감당할 수 없으니, 체직하소서.”하니, 중종이 사헌부의 건의대로 김해부사를 교체하였다.[『중종실록』 39년 4월 19일 4번째기사]이에 남치욱은 파직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명종 시대 활동
1554년(명종 9) 함경도 6진(縝)의 경흥부사(慶興府使)에 임명되었는데, 그해 5월에 야인(野人) 골간(骨幹) 우디케족 5백여 기(騎)가 경원(慶源)의 조산보(造山堡)를 침략하였으나, 경흥부사남치욱(南致勗)이 용기를 내어 빨리 가서 구원하지 않아 경원성이 거의 함락할 지경에 이르렀다. 조방장(助防將) 최한정(崔漢貞)이 우디케족의 추장을 쏘아 죽이자, 우디케족들이 마침내 달아났다. 함경북도 병마사이사증(李思曾)이 조정에 보고하니, 명종이 남치욱을 삭탈관작하여 충군(充軍)하도록 명하였다.[『국조보감(國朝寶鑑)』 권22]
1555년(명종 10) 명종이 남치욱에게 직첩(職牒)을 돌려주고 다시 서용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평안도인산첨사(麟山僉使)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평안도안주목사(安州牧使)에 임명되었다.[『명종실록』 10년 5월 17일] 만년에 중추부 첨지사(僉知事)를 지냈다.
성품과 일화
남치욱은 젊었을 때 동생 남치근과 함께 일재(一齋) 이항(李恒)에게 무술을 익혀서, 형제가 모두 무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이항은 『대학(大學)』에 정통한 유학자인데, 힘이 세고 활 쏘고 말 타는 데에 당대의 으뜸이어서, 일찍이 과거의 무과를 준비한 적이 있었다. 이에 남치욱(南致勖)⋅남치근(南致勤) 형제는 이항의 문하(門下)에서 무술(武術)을 닦으며, 경서(經書)를 아울러 공부하여, 문무(文武)를 겸전한 무장이 되었다.남치욱은 여러 아들에게도 유학의 경서(經書)를 읽고 무술(武術)도 아울러 익히게 하였다. 맏아들 남언순(南彦純)도 문무를 겸전한 무장이 되었다. 처음에 남치욱과 동생 남치근(南致勤) 형제가 같은 해에 모두 무과(武科)에 장원 급제하자, 사람들이 형제의 뛰어난 무술(武術)에 감탄하였는데, 30년 뒤에 맏아들 남언순(南彦純)도 무과에 장원 급제하자, 여러 명문 집안사람들이 ‘한 집안에서 세 사람의 장원이 나왔다’고 부러워하였다.
남치욱은 여러 아들을 유명한 유학자 이황(李滉)⋅서경덕(徐敬德)⋅이항(李恒) 등의 문하(門下)에 보내어 다양한 학식을 폭넓게 공부하게 하였다. 둘째아들 동강(東岡) 남언경(南彦經: 1528~1593)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학풍을 계승하고 명나라의 양명학(陽明學)을 받아들여 우리나라 최초의 양명학자로 유명하며, 그 제자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가 그의 양명학을 계승 발전시켰던 것이다.
후손
부인 문화유씨(文化柳氏)는 첨정(僉正)유한평(柳漢平)의 딸인데, 슬하에 아들 4형제를 두었다.장남 남언순(南彦純)은 일재(一齋) 이항(李恒)의 지도를 받아 1558년(명종 13) 식년(式年) 무과에 장원 급제하여, 승지(承旨)를 지냈다. 차남 동강(東岡) 남언경(南彦經)은 유일(遺逸)로서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인데, 양명학자로 유명하며, 이조 참의(參議)와 전주부윤(全州府尹)을 지냈다. 삼남 진사(進士)남언진(南彦縝)은 이항(李恒)의 문인인데, 사평(司評)을 지냈다. 사남 진사(進士)남언기(南彦紀)는 서경덕(徐敬德) 문인인데, 별좌(別坐)를 지냈으나, 유일(遺逸)로 남으려고 과거도 보지 않고 벼슬도 하지 않았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무과방목(武科榜目)』
- 『간이집(簡易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명재유고(明齋遺稿)』
- 『성재집(省齋集)』
- 『소재집(穌齋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일재집(一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