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추(南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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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생몰 연대 미상.] 조선 중기 중종 때의 문신. 도교의 선가(仙家). 행직(行職)은 성균관 전적(典籍)⋅동복현감(同福縣監)이다. 자(字)는 계응(季應)이고, 호(號)는 서계(西溪)⋅선은(仙隱)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초년에는 전라도 곡성(谷城)에, 만년에는 전라도 영광(靈光) 삼계(森溪)에 거주하였다. 아버지는 남계신(南繼身)이다. 훈구파 남곤(南袞)이 남추를 사림파인 조광조의 일파로 지목하면서 온갖 수난을 겪었다.

중종 시대 활동

1507년(중종 2)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다.[<사마방목>] 그 뒤 7년이 지난 1514년(중종 9)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문과방목>] 급제(及第) 남추가 아직 관직에 보임되지 못하고 있을 때에 고향 전라도 곡성(谷城)에 내려갔었다. 그때 부역 문제 때문에 곡성현감나안세(羅安世)와 다투다가, 격분한 남추가 곡성현감의 실정(失政)을 전라도 감사(監司)에게 고소하였다. 전라도 감사는 고을 백성이 자기 부모와 같은 고을의 수령을 고발하였다고 하여, 도리어 ‘부민(部民) 고소죄(告訴罪)’로 처벌하려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1516년(중종 11) 성균관 학유(學諭)에 보임되었으나, 사헌부에서 성균관 학유남추가 고향 전라도 곡성에 갔을 때에 곡성현감의 과실을 전라도 관찰사에게 고발한 것은 ‘부민 고소죄’에 해당된다고 탄핵하면서, 남추는 파직당하고 장형(杖刑) 1백 대와 유형(流刑) 3천 리(里)의 형벌을 받았다.

1517년(중종 12) 평안도 의주(義州)로 유배되었는데, 의주에 유배된 남추가 중종에게 상소하여 억울함을 하소연하고, 사림파의 참판최명창(崔命昌)이 구원하면서, 마침내 유배에서 풀려났다.[『중종실록』 12년 2월 22일 3번째기사] 그 뒤에 사림파의 참의이성동(李成童)의 천거로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사림파 조광조(趙光祖) 일파로 몰려서, 훈구파 남곤(南袞)에 의하여 전라도 영광(靈光)으로 추방되었는데, 3년 동안 유교의 경전(經典)을 연구하고, 도교의 선가(仙家)에 대하여 깊이 탐구하였다.

1522년(중종 17) 전라도동복현감(同福縣監)에 임명되었으나,훈구파 출신의 대간(臺諫)들이 탄핵하기를, “동복현감남추가 고향 곡성에 있을 때 곡성현감을 고소한 ‘부민 고소죄’는 사풍(士風)에 관계된 일이므로 수령이 될 수 없으니, 체임하소서.”하니, 중종이 그를 체임하였다.

1525년(중종 20) 해운판관(海運判官)에 임명되었다. 당시 전라도 조선(漕船) 19척이 곡식 5천 6백여 석을 싣고 서울로 오다가 파선하는 일이 발생하였는데, 조정에서 해운판관을 파직하여 구속하고, 남추를 새로운 해운판관으로 임명하였던 것이다.[『중종실록』 20년 6월 22일 3번째기사]

중종 후반기 훈구파 남곤 일파가 정권을 잡자, 남추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전라도 영광(靈光) 삼계(森溪)로 물러가서 은거하였다. 도교(道敎)의 선서(仙書)와 도경(道經)을 읽고 전국의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아다니며 신선(神仙)의 도(道)를 닦았다. 장주(長洲) 홍만종(洪萬宗)은 『해동이적(海東異蹟)』에서 우리나라의 도교의 선인(仙人) 중에서 이적(異蹟)을 보인 인물을 골라서 38명을 뽑았는데, 단군(檀君)⋅혁거세(赫居世)⋅동명왕(東明王)을 비롯하여 신라의 최치원(崔致遠), 조선의 김시습(金時習)⋅정희량(鄭希良)⋅남추(南趎) 등이 그 도교의 유명한 도사(道士)로 선정되었던 것이다.[『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61] 방랑하다가 심장병으로 돌아갔다. 그가 남긴 글은 『촉영부(燭影賦)』 등이 있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강직하여 남에게 고개를 숙이지 못하였다.

1514년(중종 9) 남추(南趎)가 과거에 급제하고 9품의 권지(權知: 임시직) 관직에도 보임되지 못하고 있을 때 훈구파의 영수 남곤(南袞)이 좋은 관직에 추천하겠다고 하며, 젊은 남추를 집으로 초청하였다. 이조 참판남곤은 급제한 남추가 문장에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남추를 끌어들여 그의 일파로 만들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남곤이 남추에게 은근하게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그대의 문장이 남보다 뛰어나다고 하니, 나를 위하여 시를 한 편 지어서 보여주면 좋겠소이다.”하고, 집 앞에 있던 화분에 심은 소나무 분재를 가리키며 시를 짓도록 명하였다. 남추가 즉시 시를 읊기를,

한 그루 소나무 분재의 줄기는 약하지마는, / 一朶盆莖弱

천년에 눈보라를 견디는 자태가 씩씩하구나. / 千秋雪態豪

구부러진 너의 몸을 누가 능히 펴주어서, / 誰能伸汝曲

높이 낀 저녁 구름을 헤치고 곧게 뻗을까. / 直拂暮雲高

하고, 남추가 소나무 분재를 통하여 비록 사림파가 훈구파의 탄압을 받고 구부리고 있지만 언제인가 사림파가 먹구름을 헤치고 일어날 것이라는 뜻을 읊었으므로, 남곤이 크게 노하여 드디어 교유(交遊) 관계를 끊어버렸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8] 이때부터 남추는 사림파로 지목되어, 훈구파의 탄압을 받아서 온갖 수난을 겪었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 『눌재집(訥齋集)』
  • 『대동기문(大東奇聞)』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연암집(燕巖集)』
  • 『열하일기(熱河日記)』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오탄집(梧灘集)』
  • 『임하필기(林下筆記)』
  • 『지봉유설(芝峯類說)』
  • 『지퇴당집(知退堂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학포집(學圃集)』
  • 『해동이적(海東異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