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성(南二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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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25년(인조 3)∼1683년(숙종 9) = 59세.] 조선 중기 효종~숙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예조 판서(判書)⋅홍문관 부제학(副堤學)이고, 시호는 장간(章簡)이다. 자(字)는 중휘(仲輝)이고, 호(號)는 의졸(宜拙)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평강군수(平康郡守)남식(南烒)이고, 어머니 서씨(徐氏)는 서주(徐澍)의 딸이다. 승지남언순(南彦純: 남언경의 형)의 증손자이고, 예조 참판남노성(南老星)의 8촌 동생이고, 영의정남구만(南九萬: 1629∼1711)의 3촌이다. 서인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지지하여, 대간(臺諫)으로서 남인들을 공격하는 데에 앞장섰다.

효종 시대 활동

1657년(효종 8)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생원과(生員科) 양과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33세였다.[<사마방목>]

현종 시대 활동

1662년(현종 3) 정시(庭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8세였다.[<문과방목>] 그때 그보다 일찍이 과거에 합격한 조카 남구만이 고시관으로 참여하였다.

1663년(현종 4)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고, 1664년(현종 5)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다가, 홍문관 교리(校理)로 승진하였다. 함경북도 북병사(北兵使)의 막료인 북평사(北評事)에 임명되었으나, 병이 많다고 하여 면직되어, 다시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다가, 교리가 되었고, 다시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

1665년(현종 6) 다시 홍문관 교리가 되어, 관상감(觀象監)의 측후관(測候官)을 겸임하여 하늘의 별을 관찰하였는데, 그때 혜성(彗星)이 다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 뒤에 이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

1666년(현종 7) 홍문관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가, 이조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였다.

1667년(현종 8) 이조 정랑남이성이 도목정사(都目政事)에서 인사 행정을 잘못 처리하였다고 하여,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좌천되었다. 다시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되어, 수찬(修撰)박세당(朴世堂)과 함께 남인(南人) 권대운(權大運)을 탄핵하였다. 그 뒤에 다시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어, 서인(西人)의 재상 김수항(金壽恒)을 변론하였다.

1668년(현종 9) 전염병이 전국에 창궐하자, 나라에서 명산대천(名山大川)에 제사를 지내고 기도하였는데, 응교남이성은 강화도에 가서 여제(厲祭)를 지냈다. 그 뒤에 홍문관 부응교(副應敎)가 되어,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을 겸임하였고, 홍문관 응교로 승진하였다. 다시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다가, 다시 홍문관 부응교가 되었다.

1669년(현종 10) 홍문관 응교가 되었다가, 사헌부 집의를 거쳐,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다. 이때 『어록해(語錄解)』를 교정하여 간행하였다.

1670년(현종 11)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하였는데, 부묘 도감(祔廟都監)의 낭청(郎廳)으로 수고하였기 때문이다.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고,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가, 좌부승지(左副承知)가 되었다.

1671년(현종 12) 충청도 감사(監司)로 나가서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1673년(현종 14)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었는데, 1674년(현종 15) 2월에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돌아가자, 인조의 계비 조대비(趙大妃: 자의대비)의 상복을 둘러싸고 제2차 예송(禮訟)인 <갑인(甲寅) 예송>이 일어났다. 대사간남이성은 노론(老論) 송시열(宋時烈)의 대공복(大功服: 9개월 복제)을 지지하여, 남인(南人) 허목(許穆)⋅윤휴의 기년복(期年服: 1년 복제)을 공격하다가, 마침내 기년복이 채택되자, 남인이 정권을 잡고 남이성은 진도(珍島)로 유배되었다.

숙종 시대 활동

1676년(숙종 2) 남이성은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남인이 정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서용(敍用)되지 못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나서, 남인 허적(許積)의 정권이 무너지고, 서인이 정권을 잡자, 동부승지로 발탁되었다가,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부제학남이성이 홍문관에 들어갈 만한 인재를 선발하여, 홍문록(弘文錄)을 만들었는데, 그때 홍문록에 선록된 11명 중에서 오도일(吳道一)⋅박태보(朴泰輔) 등은 숙종 후반기 명신(名臣)이 되었다. 호조 참판(參判)이 되었다가,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고, 대사헌(大司憲)⋅대사간(大司諫)을 거쳐, 예조 참판(參判)이 되었다. 그때 숙종의 왕비 인경왕후(仁敬王后)가 돌아가자, 빈전도감(殯殿都監) 제조(提調)가 되어 장례를 치렀다.

1681년(숙종 7) 다시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가,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 그때 숙종이 인현왕후(仁顯王后)를 계비(繼妃)로 맞이하였는데, 인현왕후는 서인의 중진 민유중(閔維重: 민중정의 형)의 딸이었다. 대사헌이 되었다가,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

1682년(숙종 8) 동지사(冬至使) 겸 사은사(謝恩使)의 부사(副使)에 임명되어, 정사동원군(東原君) 이집(李潗)과 서장관 신완(申玩)과 함께 중국 청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다시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가,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고,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1683년(숙종 9) 대사헌으로 있다가, 행(行) 사직(司直)을 거쳐, 예조 판서(判書)에 임명되었다. 그해 12월 13일에 갑자기 돌아가니, 향년이 59세였다.

성품과 일화

1683년(숙종 9) 12월 13일 『실록(實錄)』의 졸기(卒記)를 보면, “남이성은 사람됨이 소탈하고 겉치레가 없었으며, 조정에 벼슬할 때에는 볼 만한 업적이 상당히 많았다. 문사(文詞)에도 뛰어났으나, 만년에 술을 너무 좋아해서 술병으로 죽었는데, 나이가 59세이었다. 시호(諡號)는 장간(章簡)이다.” 하였다.[『숙종실록』 9년 12월 13일 3번째기사] 남이성은 일찍부터 재간과 명성이 있었으며, 조정에서 나랏일을 의논할 때에는 항상 관대하고 공평하였으며,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을 가리는 데에 의연한 태도를 취하였다.

1669년(현종 10) 3월에 궁중에서 며칠 동안 무재(武才)를 시취(試取)하였는데, 현종이 연일 무사들의 무술 경기를 구경하면서 하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권법(拳法)이나 채찍 곤봉 같은 것은 마치 아이들의 놀음놀이와 같았는데, 어좌(御座)의 가까운 곳에서 시재(試才)하였으므로, 관람하는 자들이 이를 보고 매우 놀라워했다. 장전(帳殿)의 좌변에 높은 누각이 하나 있었는데, 울타리를 치고 장막으로 둘러서, 사람들이 모두 그 안에서 구경하였다. 홍문관 응교남이성(南二星)이 이것을 보고 차자(箚子)를 올려서 이를 간언하니, 현종이 기분을 상하여 자리에서 일어나서 내전(內殿)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때 정승정태화(鄭太和)가 정승허적(許積)에게 말하기를, “옥당(玉堂: 홍문관)에서 차자를 올려서 간하였는데, 우리들은 재상으로서 주상(主上)을 모시고 온종일 시재(試才)하는 것을 구경하였으니, 이것은 우리가 잘못한 것입니다.” 하였다. 얼마 뒤에 현종이 남이성의 차자에 답하기를, “앞으로 유의를 하겠다.”고 하였다. 남이성은 임금과 재상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서슴없이 직언(直言)하였던 것이다.

후손

부인 심씨(沈氏)는 심지함(沈之涵)의 딸이다.[<방목>] 아들 남수만(南受萬)은 음서(蔭敍)로 공조 좌랑(佐郎)을 지냈다.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영조]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관복재유고(觀復齋遺稿)』
  • 『국조보감(國朝寶鑑)』
  • 『귀암집(歸巖集)』
  • 『기언(記言)』
  • 『노봉집(老峯集)』
  • 『농암집(農巖集)』
  • 『도곡집(陶谷集)』
  • 『도암집(陶菴集)』
  • 『동명집(東溟集)』
  • 『동춘당집(同春堂集)』
  • 『만기요람(萬機要覽)』
  • 『만정당집(晩靖堂集)』
  • 『명곡집(明谷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문곡집(文谷集)』
  • 『문정공유고(文貞公遺稿)』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헌집(白軒集)』
  • 『백호전서(白湖全書)』
  • 『삼연집(三淵集)』
  • 『상변통고(常變通攷)』
  • 『서계집(西溪集)』
  • 『석재고(碩齋稿)』
  • 『소재집(疎齋集)』
  • 『손암집(損庵集)』
  • 『송곡집(松谷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수촌집(水村集)』
  • 『식암유고(息庵遺稿)』
  • 『야당유고(野堂遺稿)』
  • 『약천집(藥泉集)』
  • 『양파유고(陽坡遺稿)』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외재집(畏齋集)』
  • 『월주집(月洲集)』
  • 『유재집(游齋集)』
  • 『응재집(凝齋集)』
  • 『이계집(伊溪集)』
  • 『일암집(一菴集)』
  • 『임하필기(林下筆記)』
  • 『정재집(定齋集)』 『종묘의궤(宗廟儀軌)』
  • 『죽서집(竹西集)』
  • 『죽헌집(竹軒集)』
  • 『중암집(重菴集)』
  • 『지수재집(知守齋集)』
  • 『지촌집(芝村集)』 『지호집(芝湖集)』
  • 『창계집(滄溪集)』 『초려집(草廬集)』
  • 『충렬공유고(忠烈公遺稿)』
  • 『한수재집(寒水齋集)』
  • 『호곡집(壺谷集)』 『화포유고(花浦遺稿)』
  • 『회은집(晦隱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