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진(南陽鎭)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시대 경기도 남양 지역에 설치한 지방 방위 조직인 진관.

개설

남양은 종전의 익주목(益州牧)이 고려 충선왕 때 남양부로 격하되고 공양왕 때 경기(京畿)가 확대되면서 양광도에서 좌도로 옮겨졌으며, 조선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조선 태종 때 도호부로 고쳐졌고, 세조 때 지방 군제를 진관(鎭管)체제로 개편하면서 수원진에 소속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에 영장제가 도입되면서 경기도의 좌영장을 겸하였다. 수도 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총융청(摠戎廳)이 설치되자 그에 소속되었다. 정조 때 수원이 유수부로 승격하고 장용외영 설립을 계기로 비로소 남양진관이 설치되었다. 개항 이후에 총융청이 혁파되고 친군우영으로 바뀌자 그에 소속되었다. 일시적으로 통어영, 이어서 총제영을 두기도 했으나 혁파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310년(고려 충선왕 2)에 종전의 익주목(牧)에서 남양부(府)로 강등되었다. 1390년(고려 공양왕 2) 경기를 확대했을 때 양광도(楊廣道)로부터 이속되어 좌도(左道)에 붙여졌으며, 조선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아울러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1413년(태종 13)에 이르러 도호부(都護府)로 바뀌었다. 1455년(세조 1)에 양계(兩界) 지역에 설치하였던 군익도(軍翼道)체제를 전국으로 확장하면서 연해뿐만 아니라 내륙에도 중간 규모의 진영인 거진을 두고서 주변 고을을 분속시키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 당시에는 부평도(富平道)의 좌익(左翼)으로 정해졌다(『세조실록』1년 9월 11일). 이어 1457년에 군익도체제를 진관체제로 개편하면서 제도(諸道)의 중익·좌익·우익을 혁파하는 대신 주요 지역을 거진으로 삼고 주변의 제진(諸鎭)을 그 휘하에 소속시킬 때 수원진(水原鎭)으로 옮겼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지방 군제가 크게 변화했다. 영장제(營將制)까지 도입되면서 여러모로 달라졌다. 먼저 군사적 식견이 있는 당상관을 전임의 영장으로 파견하여 거진 수령의 군사 지휘권을 이양받게 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했다. 하지만 유지 비용이 커서 병자호란 이후에 수령이 겸하게 했는데, 남양(南陽)도 중진(重鎭)으로서 그 대상지에 속했다. 『속대전(續大典)』에 남양부사가 좌영장(左營將)을 겸하도록 규정하였다.

인조반정 이후에는 도성의 방위를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1624년(인조 2) 총융청을 설치하여 경기도병마절도사 대신 경기도 병력을 거느리게 했는데, 얼마 뒤 남양도 이에 속하게 되었다. 1687년(숙종 13) 남한산성으로 이속되었다가 다시 복귀하였다.

『속대전』과 같은 시기에 편찬된 『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에 따르면 총융외영의 좌영에 속했으며, 금천·안산·과천·양천을 거느렸다.

1793년(정조 17) 수원이 유수부로 승격되고 장용외영 설립을 계기로 그에 소속되었던 제진을 넘겨받아 정식 진관이 되었다. 그 내용이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수록되었다.

조직 및 역할

『대전회통』에 의하면 종3품 남양도호부사가 종3품 병마첨절제사를 겸하면서 진관을 통솔하되, 그에 소속된 부평·인천·통진에서는 부사가, 안산·안성·김포에서는 군수가 종4품의 병마동첨절제사를, 진위·양천·용인·시흥·양성에서는 현감이 종6품의 병마절제도위를 겸하여 지휘를 받았다. 대체로 과거에 수원진에 소속되었던 제진들이었다.

그리고 총융청의 전진영장(前鎭營將)을 겸했는데 처음에는 매년 봄과 가을에 장단·파주 및 남양·수원을 남북으로 나누어 각 2영씩 돌아가면서 훈련시켰다. 그런데 수원이 총리영으로 승격되어 빠진 뒤에는 3영을 돌아가면서 훈련시켰다.

변천

1883년(고종 20)에 경기도 연해에 있던 해방병포(海防兵砲)의 훈련을 통할시킬 목적으로 해방아문(海防衙門)을 설치하여 처음에는 수군을 통솔하였다. 다시 이듬해 총융청에 소속되었던 남양 등의 속오군(束伍軍)을 거느리게 했다(『고종실록』 21년 9월 2일). 총융청이 혁파되고 친군우영으로 바뀌자 겸남양진병마첨절제사친군우영전영장토포사(兼南陽鎭兵馬僉節制使親軍右營前營將討捕使)로 고쳤다(『고종실록』 22년 12월 11일).

1893년(고종 30)에 통어영을 남양부로 옮겨 연해총제사라 부르게 했다(『고종실록』30년 1월 26일). 이를 계기로 남양부사가 겸했던 친군(親軍) 전영장(前營將)을 감하(減下)하며, 전에 소속되었던 양천을 파주로 옮겼다. 이듬해 총제영이 혁파되자 기영(畿營)으로 환속되었다(『고종실록』 31년 6월 27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속대전(續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만기요람(萬機要覽)』
  • 배항섭, 『19세기 조선의 군사제도연구』, 국학자료원, 1999.
  • 서태원, 『조선후기 지방군제연구』, 혜안, 1999.
  • 육군본부, 『한국군제사 - 근세조선후기편 -』, 1977.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 차문섭, 『조선시대군사관계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96.
  • 최효식, 『조선후기군제사연구』, 신서원, 199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