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소영(南小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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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5년(숙종 21) 한성의 남부 명철방 남소문 옆에 설치하였던 어영청의 분영.

개설

조선후기 중앙 군영의 하나인 어영청은 한성의 여러 곳에 주둔지와 창고가 있었는데, 남소영은 1695년(숙종 21) 남산 아래인 남소동(南小洞)에 창설되어 19세기 말까지 존속하였다. 남소영은 군사들의 주둔지인 동시에 화약 등 각종 군기를 보관하는 창고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623년(인조 1)에 왕이 개성으로 출전할 때 호위군으로 처음 편성된 어영군(御營軍)은 이듬해 초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확대되어 8월 왕의 호위 군영인 어영청으로 창설되었다. 어영군은 계속 확대되어 병자호란이 일어난 1636년(인조 14)에는 6천여 명이 되었다. 전쟁 이후에도 인원이 약간 증가하였고, 6번으로 나누어 1번에 1,100명씩 번상하도록 하였다. 어영청은 1643년(인조 21)에는 어영대장 이외에 새로 도제조(都提調)를 두는 등 군영 체제를 갖추었으나, 아직 겨울철 이외에는 도성에 항시 상주하는 군병을 확보하지 못하였다.

1652년(효종 3)에 어영군의 정원은 크게 확대되어 21,000여 명이 되었고 1년에 2개월씩 번상하되 한 번에 1,000명씩 올라오도록 함으로써 항상 1,000명의 어영군이 도성에 상주하도록 하였다. 어영청은 도성 상주 군영이 되면서 군영 건물과 각종 창고 등을 새로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어영청은 확대되기 시작한 1651년에 분영(分營)으로서 신영(新營)을 처음 설치하였는데 그 규모는 505칸에 달하였다. 1654년(효종 5)에는 집춘영(集春營)을 추가로 설치하였다. 어영청이 훈련도감과 함께 도성 내 방어의 주요 군영이 되면서 각종 군기와 화약 등을 보관할 필요성이 높아지자 1695년(숙종 21) 남산 아래인 남소동에 남소영을 창설하였다. 이후에도 어영청의 분영을 여러 곳에 설치하였다. 『만기요람』에 의하면 어영청은 한성의 여러 곳에 분영을 두었는데, 이현(梨峴)에 신영, 남소동에 남소영, 선인문과 경희궁의 개양문(開陽門)에 동영(東營) 2개소, 집춘문 밖에 집춘영(集春營), 경희궁의 무덕분 밖에 북이영(北二營) 등이 있었다. 이 외에도 약방(藥房), 직방(直房) 2개소, 화약고(火藥庫), 식목소(植木所), 양어소(養魚所) 등 다양한 부속 시설이 곳곳에 있었다. 남소영에는 여러 군병이 주둔할 뿐만 아니라 52칸의 화약고가 함께 있었다.

조직 및 역할

명철방의 남소동에 있던 남소영의 청사는 모두 194칸이었는데, 여기에는 초관(哨官) 1인과 향군(鄕軍) 12인이 입직하여 관리하였다. 아울러 화약고에도 초관 1인과 향군 6명을 편성하여 입직하며 관리하였다. 남소영에는 창고가 18문이 있었는데 13문에는 군기(軍器)를 보관하였고, 4문에는 군물(軍物), 그리고 1문은 비워 두었다. 아울러 화약고가 함께 있었다. 이처럼 남소영은 군사들의 주둔지이며, 동시에 화약 등 각종 군기를 보관하는 창고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남소영은 그 위치가 남산 아래에 있어 주변이 막힌 지형으로 군기 등의 관리가 용이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간도 상당히 넓었으므로 조선후기에는 각종 무과의 시험 장소로 자주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무과의 시험 장소로는 조선초기 이래 훈련원(訓鍊院)과 모화관(慕華館)이 1, 2소(所)로 사용되었으며, 무과에 응시하는 인원이 많은 경우 3소를 마련하였다. 1800년(정조 24) 3월의 무과 정시(庭試)에는 35,891명이 참여하였다. 이에 남소영을 무과 3소로 설치하여 14,250명이 시험을 치렀다(『정조실록』 24년 3월 21일). 특히 18세기 후반인 정조대에는 왕이 남소영에 행차하여 각종 무과를 시행하기도 하였는데, 예를 들어 1779년(정조 3) 8월 20일 남소영에 행차하여 여러 장사(將士)들의 별시사(別試射)를 시행하였다(『정조실록』 3년 8월 20일). 1792년(정조 16) 8월 말에도 남소영에 행차하여 권무과(權武科)를 행하여 권무군관(勸武軍官)이극풍 등 13인을 합격시키고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直赴]할 수 있도록 하였다(『정조실록』 16년 8월 28일).

변천

남소영은 처음에는 입직하는 향군을 12명 두었으나 이후 입직하는 향군을 9명으로 줄였다. 1819년(순조 19) 3월 말에 남소영의 화약고에 큰 화재가 발생해 194칸의 공해(公廨) 중 100칸과 그곳에 보관 중이던 화약 93,280근, 연환(鉛丸) 611,400개, 왜황(倭黃) 4,800근, 향황(鄕黃) 4,860근 등이 불타 없어졌다. 그리고 향군인 창고지기 20명이 불에 타 죽었다. 이 사건에 책임을 물어 어영대장이당(李溏)을 삭직(削職)하고 병조 판서와 포도대장에게 실화의 원인을 조사하도록 하였다(『순조실록』 19년 3월 28일). 1884년(고종 21) 11월에 어영청이 금위영과 합쳐져 친군별영(親軍別營)이 되고 남소영은 그 소속 분영이 되었다가 1894년(고종 31)에 친군 제도를 혁파하고 이듬해 친위대(親衛隊) 등 신식 군대를 창설하면서 남소영은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1895년(고종 32) 일본인에 의한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 5년 뒤인 1900년(고종 37) 10월 고종은 원수부(元帥府)에 명하여 남소영의 옛 터에 장충단(獎忠壇)을 세워 을미사변 당시 궁궐로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려던 일본 낭인(浪人)들을 저지하다가 전사한 시위대장홍계훈(洪啓薰) 등 조선 장병들을 배향(配享)하여 제사 지내도록 하였다(『고종실록』 37년 10월 27일). 그러나 1910년(고종 47) 8월 한일합병 이후 일제에 의해 장충단은 폐사되고 1920년대 후반부터 이곳 일대는 장충단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어영청사례(御營廳事例)』
  • 육군 군사연구소, 『한국군사사』7, 경인문화사, 2012.
  • 이태진,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한국연구원, 1985.
  • 최효식, 「어영청연구」, 『한국사연구』40, 198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