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소관(南小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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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 조선 사신을 대접하던 객관.

개설

청대 건륭 이후 조선 사신들이 북경에 머물 때 사용하던 객관의 이름이었다. 옥하관(玉河館)이라고도 불리었다. 명대에는 회동관(會同館)이 설치되어 변방민족의 사신과 외국 사절을 접대하였다. 청대에 이르러 명나라 제도를 따라 회동관이 설치된 뒤 조선 사신들은 명대 사용하던 옥하관을 전용하였다. 강희 연간 말에 러시아인들이 이곳을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러시아인들이 들어오면 반드시 이곳에 체류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조선 사신들은 회동사역관(會同四譯館)의 별관에서 머물렀다. 이 객관은 규모가 작아 남소관이라고 하였다. 뒤에 남소관 역시 옥하관으로 불리었다. 남소관에 화재가 발생한 일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정조실록』 4년 9월 17일).

위치 및 용도

북경시 동성구(東城區) 전문동대가(前門東大街) 북경시공안국(北京市公安局) 건물 일대에 해당하였다. 옥하관은 명대 회동관의 남관(南館)을 지칭하며, 옥하(玉河)의 남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옥하관의 위치는 현재 북경의 동교민항(東交民巷) 최고인민법원(最高人民法院) 건물 일대에 해당하였다. 청대 건륭 연간부터 조선 사신들이 머물렀던 남소관은 옥하관에서 남쪽으로 약 1리(0.4㎞)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사절이 입경하여 관사에 머무르게 되면 회동사역관의 남관에서 대사(大使) 1명을 파견하여 양식·도구·연료 등의 물자를 공급하고 예부(禮部)에 보고하였다.

변천 및 현황

명대 영락 연간 조공 사신을 접대하는 관소로서 회동관이 설치되었다. 1441년(정통 6) 회동관의 남관과 북관(北館)이 정해졌다. 조선 사신들이 머무르던 곳은 남관으로 옥하관이라고 칭하였다. 당시 남관은 조선 사신들만 전문적으로 사용하던 공간은 아니었고 오이라트·조선·일본·안남 등이 이곳에 머물렀다. 주변의 토사(土司) 각 왕부(王府)의 공식 사절 등은 북관을 사용하였다.

청대에 이르러 회동관은 명제를 답습하였는데, 옥하관은 조선 사신단들에 의하여 전적으로 사용되면서 ‘조선관’·‘고려관’으로 칭해졌다. 하지만 강희 연간 말에 러시아인들이 옥하관을 강점하여, 조선 사신들은 하는 수 없이 회동사역관의 남관에서 머물렀다. 당시 회동사역관의 남관은 옥하관보다 규모가 작아 남소관이라고 하였다. 이후 남소관 역시 옥하관으로 불리었다. 회동관은 1903년에 혁파되었다.

형태

이갑(李岬)의 『연행기사(燕行紀事)』에 따르면 남소관은 제1문 안에 대청이 있고 제2문 제일 안쪽에 만주식 구들로 설치된 상방(上房)이 있고 부방(部房)이 상방(上房)과 서로 이어져 있었다. 대청에는 설음식으로 바치기 위하여 가져온 세폐 물건을 쌓아 두고 상방(上房)은 정사와 부사 및 서장관이 각각 사용하였다. 부방의 객사는 구들이 넓고 커서 3~4칸에 달하였다. 뜰은 매우 좁고 관 안에 구들방은 모두 10여 개로 일행이 거처를 나누어 썼다.

참고문헌

  • 『연행기사(燕行紀事)』
  • 鄭天挺·吳澤·楊志玖 主編, 『中國歷史大辭典』, 上海辭書出版社, 2000.
  • 박현규, 「명청 시대 북경 조선사관(朝鮮使館) 고찰」, 『중국사연구』 82, 중국사학회, 2013.
  • 백옥경, 「18세기 연행사의 정보수집활동」, 『명청사연구』 38, 명청사학회, 2012.
  • 원재연, 「17~19세기 연행사의 북경 내 활동공간 연구」, 『동북아역사논총』 26, 동북아역사재단, 2011.
  • 祁慶福·金成男, 「淸代北京的朝鮮使館」, 『淸史硏究』,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