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학(南溟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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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31년(영조 7)∼1798년(정조 22) = 68세.] 조선 후기 영조~정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사헌부 감찰(監察)⋅상의원 첨정(僉正)이다. 자(字)는 성원(聖源)이고, 호(號)는 오룡재(五龍齋)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거주지는 함경도 종성(鍾城) 부계(涪溪)이다. 아버지는 남이혁(南爾赫)이고, 어머니 밀양박씨(密陽朴氏)는 박세팽(朴世彭)의 딸이다. 관북학파(關北學派)의 개조(開祖) 봉암(鳳巖) 한몽린(韓夢麟: 1684~1762)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였는데, 유한준(兪漢雋)⋅윤행임(尹行恁)⋅한몽필(韓夢弼)⋅송환기(宋煥箕) 등과 가깝게 교유하였다. 남명학과 남현룡(南陽龍) 부자는 조선 후기 관북학파(關北學派)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영조 시대 활동

1750년(영조 26)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0세였다. 함경도 종성(鐘城)에서 서울로 유학(遊學)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1759년(영조 35)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9세였다.[<사마방목>]

1763년(영조 41) 경현당(景賢堂)에서 열린 경연(經筵)에서 영조를 모시고 진강(進講)하였는데, 노론(老論)의 추천을 받아서 경연에서 특별히 진강하였던 것이다.

1768년(영조 44) 집경당(集慶堂)에서 친구 송상은(宋相殷) 등과 함께 진강하였다. 영조가 말하기를, “그대들은 지금 먼 변방에서 서울에 와서 유학(遊學)하는데,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그 말과 얼굴에 나타나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그대들은 부모를 섬기는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도록 하라.”하고, 특명으로 남명학을 현릉(顯陵: 문종의 왕릉) 참봉(參奉)에 임명하였다.[묘지명]

1769년(영조 45) 사옹원 봉사(奉事)가 되었다가, 그 뒤에 순릉(順陵: 장순 왕후의 왕릉) 직장(直長)이 되었다.

1771년(영조 47) 나이 41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 종성(鐘城)으로 돌아가서 3년 동안 두 형 남명체(南溟掣)⋅남명적(南溟積)과 함께 선영(先塋)에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1773년(영조 49) 사옹원 직장(直長)에 임명되었다가, 내자시 주부(主簿)로 승진하였고, 그 뒤에 사헌부 감찰(監察)에 임명되어, 영조 말년에 대간(臺諫)으로 활동하였다. 문과(文科)에 급제하지 않고 대간(臺諫)의 청요직(淸要職)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북관(北關) 출신의 유학자를 우대하여, 변방 지역에 교화(敎化) 정치를 펴려는 영조의 정책 때문이었다.

정조 시대 활동

1777년(정조 1) 충청도 문의현령(文義縣令)으로 나갔으나, 대간(臺諫)에서 부정(不正)을 저질렀다고 탄핵하여 파면되었다. 오래지 않아 노론의 유력한 대신(大臣)들이 힘써 구원하여 다시 서용(敍用)하게 되었다. 1780년(정조 4) 중부 도사(中部都事)에 임명되었다가, 사직서 령(令)으로 옮겼고, 그해 말에 경기도평택현감(平澤縣監)으로 나가서, 선정(善政)을 베풀어서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1785년(정조 9) 창릉 령(昌陵令)이 되었다가, 1787년(정조 11) 충청도진잠현감(鎭岑縣監)으로 나갔으나, 충청도 관찰사의 뜻을 거슬려서 파직되었다.

1794년(정조 18) 의영고 주부(主簿)에 임명되었다가, 의금부 도사(都事)로 옮겼고, 장악원 주부(主簿)가 되었다가, 사릉 령(思陵令)이 되었다.

1795년(정조 19) 정조가 윤대(輪對)할 때 남명학이 입시(入侍)하였는데, 정조가 함경도 지방의 민폐(民弊)를 묻고 말하기를, “내가 그대의 절행(節行)을 가상하게 여기는데, 그대가 전후에 관직에 의망(擬望: 후부자로 추천됨)되어 낙점(落點)을 받지 못한 것이 몇 번인가.”하니, 남명학이 대답하기를, “여섯 번입니다.”하니, 마침내 공조 좌랑(佐郞)에 임명하였다.

1796년(정조 20) 군자감 판관(判官)이 되었고, 그해 말에 익릉 령(翼陵令)이 되었다.

1797년(정조 21) 정조가 말하기를, “남명학은 먼 변방 사람이다. 오랫동안 그 뜻을 펴지 못하고 있으니, 가석(可惜)하다. 지금 전조(銓曹)에서 4품의 관직에 임명하도록 하라.”하여, 마침내 상의원 첨정(僉正)에 임명되었다. 이에 남명학이 더욱 감격하여 죽을 각오로 반드시 그 은혜를 보답하고자 하여 감히 늙었다고 하여 직사(職事)를 폐지하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하다가 마침내 병을 얻게 되었다.

1798년(정조 22) 나이 68세 때에 2월 11일에 관청에서 쓰러져서 갑자기 돌아가니, 고향 종성(鐘城)의 선영(先塋)으로 반장(返葬)하였다.[묘갈명]

문집으로 『오룡재유고(五龍齋遺稿)』 4권 1책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소박하고 정직하여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다. 나이 15세 때 어머니 상(喪)을 당하였고, 41세 때 아버지 상(喪)을 당하였는데, 그때마다 까치골[鵲洞]에 초막(草幕)을 짓고 두 형과 함께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당시 함경도에서 시묘(侍墓)살이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때 남명학은 고기를 먹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소금과 간장을 입에 대지 않고 멀근 미음을 먹었으며, 술과 과일도 먹지 않고 소식(素食)만 하였다.[『오룡재유고(五龍齋遺稿)』 부록] 또 영조가 돌아갔을 때 남명학은 전일에 영조가 남명학에게 “그대는 부모를 섬기는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도록 하라.”고 한 말씀을 떠올리고 감격하여 울었을 뿐만 아니라, 3년 동안 채식(菜食)만을 하였다.[묘지명] 남명학은 먼 변방 사람으로서 임금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집에 있을 때에는 어버이를 생각하고 평생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졌으며, 집을 나가서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에는 말이 임금님의 은혜에 미치면 눈물을 줄줄 흘리지 않는 적이 없었다. 향당(鄕黨)에 있을 때에는 사람들에게 충효(忠孝)에 힘쓰도록 가르쳤으며 다른 말은 없었다. 그러므로 남명학이 서울에서 돌아가자, 고향 종성(鐘城)의 선영(先塋)으로 반장(返葬)할 때에 관북(關北) 지방 선비들 가운데 상여(喪輿)를 맞이하여 곡(哭)을 한 사람이 무려 수 백 명이 되었으며, 모두 말하기를, “남 효자(南孝子)가 돌아갔다.”고 칭송하였다.[묘지명]

남명학은 1731년(영조 7)에 함경도 종성 부계(涪溪)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 남이혁(南爾赫)과 어머니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 3형제 중에서 막내아들이었다. 남명학의 선조가 일찍이 남도(南道)에서 함경도 6진(鎭)으로 유배되어 그 후손들이 종성에 살게 되었으며, 그 조부 남운기(南雲起)와 아버지 남이혁(南爾赫)은 유학을 공부하여 그 지방에서 존경을 받았다. 남명학은 일찍부터 두 형들을 따라서 종성의 유학자 봉암(鳳巖) 한몽린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였는데, 한몽린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그 제자 최신(崔愼)의 성리학(性理學)을 계승한 관북학파(關北學派)의 개조(開祖)였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한몽린을 ‘관북(關北)의 부자(夫子: 공자)’라고 칭송하였다. 조정에서도 변방 지역에 교화(敎化) 정책을 취하여 함경도의 선비들에게 유학을 널리 장려하여, 향시(鄕試)를 행하고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진사(進士)와 생원(生員)들을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공부하게 하였다. 남명학도 20세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하였다. 나이 29세 때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는데, 나이 32세 때 스승 한몽린이 세상을 떠나자, 종성(鐘城)으로 돌아가서 그 영전에 곡하였다. 그 문하에서 관북 선비 천여 명이 배출되었으며, 대과⋅소과에 급제한 이가 2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1801년(순조 1) 아들 남현룡이 『오룡재유고(五龍齋遺稿)』 4권 1책을 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남명학이 죽기 전에 자신의 글을 모아서 유별로 나누어 편찬하여 두었기 때문에 그가 죽은 지 3년 만에 그 아들 남현룡이 유고(遺稿)를 운각인서체자(芸閣印書體字)로 인쇄 간행하였던 것이다. 남명학이 살아 있을 때 고향의 동문수학한 친구들과 함께 스승 한몽린의 문집 『봉암집(鳳巖集)』을 편찬하고, 서울의 유력한 지인(知人)들에게 부탁하여 스승 한몽린을 모시는 서원(書院)을 종성에 건립하여 나라의 편액(扁額)을 받으려고 애썼으나, 남명학이 생전에 그 뜻을 이룩하지 못하고 죽었다. 이에 남명학의 아들 남현룡이 1807년(순조 7) 한몽린의 문인(門人)들과 함께 『봉암집』 5권 2책을 활자로 간행하였는데, 남양룡이 좌의정남공철(南公轍)에게 그 서문(序文)을 받았다. 남명학과 남현룡 부자는 송시열(宋時烈)과 최신(崔愼)⋅한세양(韓世襄)으로 이어지는 한몽린의 학통을 계승하여, 18세기 관북학파(關北學派)를 형성하는 데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함경도 종성(鐘城) 백동(栢洞) 선영(先塋)에 있는데, 지금의 함경북도 종성군 용계면(龍溪面) 까치골[鵲洞]이다. 아들 남현룡(南陽龍)이 좌의정남공철(南公轍)에게 부탁하여 지은 묘표(墓表)를 무덤 앞에 묻었다.[『금릉집(金陵集)』 권18] 남명학이 살던 종성의 부계는 경치가 아름다운 명승지로 유명한데, 그 제자들이 그곳에 사당을 짓고 그 이름을 가절당(嘉節堂)이라고 불렀다. 매년 북관(北關)의 선비들이 가절당에서 남명학⋅남현룡 부자를 제향하였다.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는 한여두(韓汝斗)의 딸인데, 슬하에 자녀는 1남 2녀를 두었다. 장남 남현룡(南陽龍)은 흡곡현감(歙谷縣監)을 지냈고, 장녀는 봉사(奉仕)김풍택(金豐澤)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참봉(參奉)김광학(金光學)의 처가 되었다. 서자는 남양태(南陽泰)이고, 서녀는 최종락(崔宗洛)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정조실록(正祖實錄)』
  • 『사마방목(司馬榜目)』
  • 『오룡재유고(五龍齋遺稿)』
  • 『금릉집(金陵集)』
  • 『기언(記言)』
  • 『봉암집(鳳巖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