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귀여제(男歸女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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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이 성립되면 신랑이 일정 기간 신부의 집에서 거주하는 풍속.

개설

남귀여제(男歸女第)는 신랑이 신부 집에서 혼례를 올린 후 바로 자기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일정 기간을 신부 집에 머무는 혼인 방식이다. 남귀여가(男歸女家), 서류부가(壻留婦家) 등은 모두 동일한 풍속 관행을 표현한 것이다. 서류(壻留), 즉 사위가 처가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면 솔서혼속(率壻婚俗)이라고 하는데, 고구려에 있었다는 서옥제(壻屋制)도 이에 해당한다.

이것은 신랑이 신부 집 못 미처 특정한 곳에 임시 집을 마련한 후 신랑 집으로 오는 신부를 중간에 맞이해 데리고 와 혼례를 갖는 『가례』의 친영(親迎) 방식과 대조적이다. 친영은 신부가 신랑 집에 와서 혼례를 올리는 중국의 혼인 풍속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친영은 신랑이 신부가 집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나아가 맞이하여 옴으로써 음에 대한 양의 적극성을 강조한 것이다. 반면 우리의 오랜 관행은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혼례를 갖고 일정 기간을 그곳에서 머무는 것이었다.

연원 및 변천

세자는 세자비 집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애초부터 남귀여제의 관행이 적용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친영의 예를 갖출 수 있었다. 공주나 옹주의 경우도 남귀여제의 관행은 여제가 궁궐이라는 점에서 조건이 맞지 않았다. 1407년(태종 7) 7월 13일 세자가 전 총제김한로(金漢老)의 집에 친영하였다고 한 것을 두고 친영의 예를 갖춘 첫 사례라고 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세종이 “혼례는 여자가 남편의 집으로 가는 것인데, 나라의 풍속이 옛 습관에 젖어서 친영하는 것을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므로 선왕께서 혼례를 바르게 하시려다가 이루지 못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1430년(세종 12) 12월 22일에 왕이 친영의 예를 행하는 것에 대해 김종서(金宗瑞)에게 묻자 답하기를 “우리나라의 풍속은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가는 것이 그 유래가 오랩니다. 만일 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곧 거기에 필요한 노비·의복·기명(器皿) 등을 여자의 집에서 모두 마련해야 되기 때문에 그것이 곤란하여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남자의 집이 만일 부자라면 곧 신부를 접대하는 것이 어렵지 않겠지만 가난한 사람은 부담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남자의 집에서도 이를 꺼려왔습니다.”고 하여, 그는 남귀여가의 풍속이 여자 집의 부담을 덜어주는 관행으로 이해하였다.(『세종실록』 12년 12월 22일)

1435년(세종 17) 3월 4일에 파원군(坡原君)윤평(尹泙)숙신옹주(淑愼翁主)를 친히 맞아 가니 본국에서의 친영이 이로부터 비롯되었다(『세종실록』 17년 3월 4일)고 기록한 것도 이전의 친영을 『가례』에 따른 것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대부가를 대상으로 남귀여제의 풍속을 비판하고 친영을 지키자는 논의가 본격화된 것은 16세기 초인 중종대에 이르러서다. 그 결과 명종대에 와서 ‘반친영(半親迎)’이라 하여 고유의 민속과 『가례』와의 절충이 이루어졌다.

절차 및 내용

남귀여제의 절차나 내용은 왕실이나 사대부가에서 친영의 예를 주장하면서 중종 이후 공식 논의에서 사라진 데다가 『조선왕조실록』 등에 기록해놓지 않아 그 정확한 실상을 알 수 없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여전히 오랫동안 지켜왔기 때문에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남귀여제와 친영을 절충한 반친영의 사례를 통해서도 그 절차의 대강을 알 수 있다.

남귀여제의 혼례 관행은 지역마다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여자 집에서 대례를 치른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차이는 여자 집에 머무르는 기간인데, 『조선왕조실록』에서 흔히 지적되는 바는 아이가 외가에서 태어나고 장성할 때까지 머물기 때문에 아이가 본가보다는 외가와 더 친근하게 지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귀여제의 풍속이 본질적으로는 여자 집의 부담을 덜어주는 관행으로 이해된다면 그와 같은 장기간의 체류는 여자 집의 경제가 넉넉한 경우에만 해당되는 예외적인 현상일 수 있다. 오히려 ‘달묵이’나 ‘해묵이’의 관행처럼 이를 신부가 신랑 집으로 돌아오는 우귀(于歸)의 기간으로 본다면 신랑이 그 기간 안에 실제 신부 집에서 살았다고 하기 보다는 며칠씩 방문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남귀여가의 혼속은 부계 친족의 자녀들이 각자의 외가에서 성장하는 기회를 주게 됨으로써 부계를 중심으로 하는 결집력 있는 친족의 결합을 방해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어왔기 때문에 조선초기부터 종법을 준수하려는 사족들에 의해 시비가 되었다. 그러나 남귀여제의 관행이 반친영의 실시로 바뀌면서 처가 또는 외가와의 단절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남귀여제의 금지와 반친영의 실시는 결국 부계 중심의 친족 결합을 장애하는 한 요인을 제거한 결과가 되었다.

참고문헌

  • 『가례(家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