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사(洛山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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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가 예종의 원당으로 지정한 관음 성지로, 강원도 양양군에 있는 절.

개설

낙산사(洛山寺)는 신라 의상(義湘) 법사(法師)가 창건하였으며 범일 국사가 중창한 관음 사찰이다. 의상 법사는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관음상을 봉안하였고 범일 국사는 정취보살을 봉안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봄·가을로 사신을 보내 재(齋)를 올리는 등 왕실에서 중시하였으나 몽고 침입 때 훼손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자주 왕실에서 사신을 보내 기청법회(祈晴法會) 등의 재를 올렸으며 잡역을 감면해 주고 여러 차례 화재가 나 무너진 것을 중수하도록 비용을 지원해 주었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오봉산(五峰山)에 소재한 낙산사는 신라의 고승 의상 법사가 창건한 사찰로 전해진다. 낙산(洛山)이라는 말은 695~699년 중국 당나라 때의 고승 실차난타(實叉難陀)가 한문으로 번역한 80권본 『화엄경』에 나오는 보달락가산(補怛洛迦山)의 줄임말로, 산스크리트어 ‘포탈라카(Potalaka)’의 음역이다. 『화엄경』「입법계품(入法界品)」에 의하면, 선재(善財) 동자가 남해에 있는 보달락가산으로 가서 관세음보살을 찾아뵙고 설법을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실차난타가 이 경전을 번역했던 시기는 의상 법사가 입적한 이후이기 때문에, 의상 법사의 낙산사 창건을 역사적 사실이 아닌 설화로 보기도 한다.

낙산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유사』에 나온다. 『삼국유사』「낙산이대성관음정취조신조(洛山二大聖觀音正趣調身條)」에 의하면, 의상 법사가 당나라 유학으로부터 돌아와 동해 해변 바위굴에 관음보살이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서 기도한 지 7일 만에 여러 신장(神將)으로부터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받았고, 다시 기도한 지 7일이 되자 동해의 용이 나타나 여의보주 한 알을 바쳤으며, 다시 7일 동안 기도하여 관음보살을 친견하였다. 관음보살이 의상 법사를 보고 ‘앉아 있는 자리에서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곳에 법당을 지으라.’고 하여, 법당을 지어 관음상을 모시고 절 이름을 낙산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2) 신라말~고려시대

신라말 범일(梵日) 국사는 858년(신라 헌안왕 2)에 낙산 아래 마을에서 왼쪽 귀가 없는 정취보살상(正趣菩薩像)을 발견하고 낙산에 법당을 지어 그 보살상을 모셨다고 한다. 이로써 낙산사에는 관음보살상과 정취보살상을 모시게 되었는데, 정취보살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조신의 꿈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범일 국사는 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사굴산문(闍崛山門)을 개창한 선사이지만, 의상의 화엄사상에 큰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강원도 지역에서는 성황신으로 추앙되어 현재까지 봉사(奉祀)되고 있다.

낙산사 두 보살의 영험에 대한 이야기는 고려시대에도 계속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 태조는 봄·가을로 낙산사에 사신을 보내 재(齋)를 올렸으며 이를 정례화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낙산의 바위굴 앞에서 지성으로 배례(拜禮)하면 푸른 새가 나타난다고 믿었다.

그러나 낙산사 두 보살상과 두 보주는 몽고군의 침입으로 수난을 당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몽고군이 침입해 왔던 1250년대에 두 보살상과 두 보주를 양양의 양주성(襄州城)으로 옮겼으나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아행 선사와 노비 걸승이 수정염주와 여의보주를 땅에 묻어 감추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두 보주를 나라에 바쳐 왕실 창고에 보관하였다. 하지만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에 의하면, 이때 관음상이 몽고군에 의해 훼손되고 복장 유물이 약탈되었던 것을 이규 등이 다시 복구하였다고 한다.

(3)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도 낙산사에 대한 왕실의 보호는 지속되었다. 태조이성계가 낙산사에서 능엄법회(楞嚴法會)를 개최하였고(『정종실록』 1년 8월 26일), 태종은 천재지변 등의 재난을 없애기 위해 도량[道場]을 베풀거나(『태종실록』 3년 8월 1일), 오랜 장마가 멈추기를 기원하는 기청법회(祈晴法會)를 베풀었다(『태종실록』 4년 7월 25일).

세조는 낙산사에 거둥하였고(『세조실록』 12년 윤3월 13일), 성종은 부역을 감하였으며(『성종실록』 1년 4월 6일), 정조 역시 세금을 감면해주었다(『정조실록』 9년 6월 21일).

낙산사의 중건은 세조 때 승려 학열(學悅)에 의해 이루어졌다. 학열은 임금에게 낙산사의 중건을 건의하여 허락을 받았다(『세조실록』 14년 3월 20일). 그런데 당시 중건 과정에서 강원도 백성에게 과도하게 세금을 거두었다는 이유로 관찰사김관(金瓘)이 국문을 당하기도 하였다(『예종실록』 즉위년 11월 9일).

1489년에 산불이 나서 인근 마을과 관음전이 불에 탔다(『성종실록』 20년 3월 14일). 그 후 1619년(광해군 11)에 관음굴을 중건하였으나 1631년(인조 9)의 화재로 다시 소실되자 종밀과 학조 등이 중건하였다. 또 1643년(인조 21)의 화재로 전각이 소실된 후 도원과 대주 등이 다시 중건하였다. 1777년(정조 1)에 다시 화재가 났고 이듬해에 중건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건봉사의 말사가 되었다. 그 후 1930년의 화재로 사찰의 일부가 전소되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 사찰 내 전체 당우가 불에 탔으나 복구되었다. 2005년 4월 대형 산불로 인하여 원통보전을 비롯한 많은 당우가 다시 소실되었으나 다시 중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참고문헌

  • 『삼국유사(三國遺事)』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건봉사본말사적(乾鳳寺本末事蹟)』
  • 강원도, 『강원도사찰지』, 강원출판사, 1992.
  • 사찰문화연구원, 『관음신앙의 성지 오봉산 낙산사』, 사찰문화연구원, 1998.
  • 한국불교연구원, 『낙산사』, 일지사, 1978.
  • 황금순, 「낙산설화와 고려수월관음도, 보타산관음도장」, 『불교학연구』18, 불교학연구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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