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익(羅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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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07년(중종 2)∼1537년(중종 32) = 31세.] 조선 중기 중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성균관 전적(典籍)이다. 자(字)는 명원(明源)이다. 본관은 안정(安定)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창릉참봉(昌陵參奉)나세걸(羅世傑)이고, 어머니 풍양조씨(豊壤趙氏)는 대사헌(大司憲)조익정(趙益貞)의 딸이다. 선릉참봉(宣陵參奉)나식(羅湜)과 홍문관 부제학(副提學)나숙(羅淑)의 동생이다. 사림파의 영수 조광조(趙光祖)⋅김굉필(金宏弼)의 제자인 맏형 나식에게 둘째형 나숙과 함께 글을 배워서 형제가 젊은 나이에 나란히 과거에 급제하였다.

중종 시대 활동

1528년(중종 23)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2세였다.[<사마방목>]

1531년(중종 26) 식년(式年)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5세였다.[<문과방목>] 바로 승문원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

1533년(중종 28) 세자시강원 설서(說書)를 겸임하고 홍문록(弘文錄)에 선록(選錄)되었다. 성절사(聖節使)의 질정관(質正官)에 임명되어 중국 명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그 뒤에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어, 춘추관 사관(史官)을 겸임하였다. 그때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가 세자(世子: 인종)를 보호한다고 하며 국정(國政)을 농단하는 것을 비방하는, 무명(無名)의 방서(榜書)가 종루에 붙었는데, 사관 나식이 이것을 사초(史草)에 써넣었다가, 김안로에게 발각되어 파직되었다.

1535년(중종 30) 경기 적성현감(積城縣監)으로 나갔으나, 병으로 사임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1537년(중종 32) 4월에 병으로 돌아갔는데, 향년이 31세였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평탄하여 남과 사귈 때에 겉으로 꾸미지 않았다. 악을 너무나 미워하여 어진 사람을 소홀히 대하고 세력가에게 빌붙은 사람을 똑바로 보지 않았다. 이로 인해 소윤(少尹)의 윤원형 일파가 가장 싫어하고 기피하는 인물이 되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나익이 살아 있었더라면 반드시 두 형보다 더 혹독한 화(禍)를 입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나익이 항상 말하기를, “간신(奸臣)들이 정권을 잡으면, 반드시 사림(士林)의 화를 빚을 것이다.”하고 깊이 우려하였는데, 나익이 세상을 떠난 지 9년 뒤에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서 큰형 나식(羅湜)과 둘째형 나숙(羅淑)이 모두 화를 면하지 못하였다. 아마도 동생 나익의 예측대로 가족의 참극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나익은 타고난 자질이 매우 아름답고 효도와 우애가 독실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맏형 나식에게 둘째형 나숙과 함께 글을 배웠는데, 맏형 나식은 일찍이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도학(道學)에 정통하였다. 초당(草堂) 허엽(許曄: 허균의 아버지)도 나식에게 글을 배웠다. 맏형 나식은 벼슬에 나가기를 싫어하여 과거를 보지 않았으나, 나숙과 나익 형제는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청요직(淸要職)에 올랐다.[묘갈명]

나익은 태어날 때부터 총명하여 겨우 말을 배울 무렵에 글을 이해하였고, 나이 8세 때에 글을 지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신동(神童)이라고 일컬었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할 때 과시(課試)로서 차운(次韻)에 따라서 시부(詩賦)를 지은 적이 있었는데, 대제학(大提學)김안로(金安老)가 그 글을 보고 매우 칭찬하였다. 그 뒤에 나익이 나식⋅나숙의 동생인 줄 알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식⋅나숙에게 또 이러한 아우가 있었다는 말인가.” 하였다. 또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홍문관에 있을 때 호당(湖堂)에서 나익을 초청하여 같이 배를 타고 한강을 유람하며, 무려 운자(韻字) 1백여 자를 내어 나익에게 시를 짓게 하였는데, 김안국이 운자를 부를 때마다 나익이 기발한 시를 척척 지었다. 이에 김안국이 경탄(驚歎)하기를, “재주 있는 사람은 당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묘갈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 양주(楊州) 북쪽 삭단리(朔端里)에 있는데, 계곡(溪谷) 장유(張維)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고흥수(高興守) 이억천(李億千)의 딸인데, 슬하에 자녀는 1남 6녀를 두었다. 외아들 나윤침(羅允忱)은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학유(學諭)를 지냈고, 장녀는 사인(士人) 박길염(朴吉恬)에게, 차녀는 변희순(卞希淳)에게, 삼녀는 첨정(僉正)곽규(郭珪)에게, 사녀는 사인(士人) 김성(金惺)에게, 오녀는 관찰사(觀察使)이용순(李用淳)에게, 육녀는 첨지(僉知)채형(蔡衡)에게 각각 시집갔다. 손자 나급(羅級)은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을 지냈고, 증손자 나만갑(羅萬甲: 나갑의 아들)은 진사시(進士試)에 장원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참의(參議)를 지냈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계곡집(谿谷集)』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대동야승(大東野乘)』
  • 『문봉집(文峯集)』
  • 『미암집(眉巖集)』
  • 『백사집(白沙集)』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월연집(月淵集)』
  • 『장음정유고(長吟亭遺稿)』
  • 『패관잡기(稗官雜記)』
  • 『학곡집(鶴谷集)』
  • 『학당유고(鶴塘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