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난보(羅暖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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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 삼수군에 설치한 군사시설인 보(堡).

개설

함경도는 조선초기부터 진보를 설치하여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고 지역사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나난보가 소속돼 있는 삼수군(三水郡)은 조선초기 본래 갑산군(甲山郡) 소속이었는데 만호를 두어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1446년(세종 28) 삼수보가 적의 침입 경로에 요해처가 된다고 하여 군을 설치하고 함흥부(咸興府)의 관할로 삼았다. 지군사(知郡事) 1인이 배속되어 함흥도우익병마(咸興道右翼兵馬)를 겸하였다. 삼수군의 요해는 크게 두 곳이 있었는데, 바로 삼수동구(三水洞口)와 나난보였다[『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삼수군].

위치 및 용도

삼수군 중심에서 동쪽으로 42리(12.6㎞) 떨어진 압록강 변에 위치하였다. 나난보의 서쪽으로는 압록강을 따라 소농보(小農堡)·갈파지(乫波知)·구갈파지(舊乫坡知)·후주(厚州) 등으로 이어지며, 동쪽으로는 인차외(仁遮外)를 거쳐 백두산 천지로 이어졌다. 나난보는 좁은 강폭을 두고 바로 이민족과 마주 보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나난보와 같은 진보는 기본적으로 함경도 최전방과 내지의 요충지에서 실질적인 방어를 담당하는 군사시설이었다. 진보는 적 침입 시 일차적인 방어처로 각지에 있는 봉수와 파수(把守)를 관리하였다. 나난보는 나난서봉(羅暖西峯) 봉수를 담당하고 있었다.

변천 및 현황

삼수군의 요해처였던 만큼 삼수군이 설치되었던 1446년(세종 28)부터 이미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1452년(단종 즉위) 평안도·함길도도체찰사황보인(皇甫仁)이 나난보의 석성 중 다 쌓지 못한 곳을 삼수의 사람을 뽑아내어 쌓게 하겠다고 아뢰는 실록 기사로 볼 때, 이 시기 나난보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가 진행됐던 것으로 보인다(『단종실록』즉위년 6월 17일). 석성을 쌓고 얼마 뒤인 1454년(단종 2)에는 올량합(兀良哈)의 기병 20여 기가 나난보 인근에 주둔하며 읍성의 군사와 강을 사이에 두고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단종실록』2년 5월 29일). 1454년(단종 2) 삼수군을 혁파하면서 삼수군에는 만호를 두고 나난보에는 천호를 두어 해당 지역을 방어하게 하였다(『단종실록』2년 10월 29일). 『만기요람』에는 1500년(연산군 6) 나난보에 만호를 두었다고 했다. 나난보는 조선후기에는 나난진(羅暖鎭)으로 승격되었다.

형태

나난보는 토성(土城)의 형태로 둘레는 338척(약 102m), 높이는 5척(1.5m)이었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여지도서(輿地圖書)』
  • 『만기요람(萬機要覽)』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오종록, 『조선초기 양계의 군사제도와 국방체제』, 고려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3.
  • 강석화, 「조선후기 함경도 육진지역의 방어체제」,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고승희, 「함경도 내지 진보의 변화」,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노영구, 「조선후기 함경남도 간선 방어체계」,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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