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성(金稀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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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65년(영조 41)~1816년(순조 16) = 52세]. 조선 후기 정조(正祖)~순조(純祖) 때의 천주교도로, <을해박해(乙亥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중인이며, 아버지는 김광옥(金廣玉)이다.

순조 시대 활동

1765년 충청도 예산 여사울(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의 부유한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김희성(金稀成)은 아버지 김광옥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자 자신도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1년(순조 1) 아버지가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순교하자 아버지를 따르겠다는 신념으로 모든 재물을 버리고 가족들과 함께 경상도 영양 곧은장(현 경북 영양군 일월면)으로 이주하였다.

1815년(순조 15) 경상도 지역에서 시작된 <을해박해>로 인해 체포된 김희성은 안동 감영에서 수감되어 심문을 받은 후 다시 대구에 있는 경상 감영으로 이송되어 문초를 받았다.(『순조실록』 15년 6월 18일),[『일성록』순조 15년 6월 19일] 당시 심문을 진행한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이존수(李存秀)는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김희성은 집안에 천주교 서적을 숨겨왔으며, 평소에 십계명과 같은 요상한 글들을 이웃과 함께 외우곤 했습니다.”라는 사형선고문을 올렸고, 김희성은 그해 10월 18일 사형선고를 받았다.[『일성록』순조 15년 10월 18일],[『승정원일기』순조 15년 10월 18일] 그러나 사형에 대한 순조(純祖)의 최종적인 재가는 이듬해인 1816년(순조 16) 10월 21일에 이루어져, 김희성은 그로부터 얼마 후인 11월 8일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형으로 사망하였다.[『일성록』순조 16년 10월 21일],[『일성록』순조 16년 11월 8일],(『순조실록』16년 11월 8일) 당시 그의 나이 52세였다.

이후 김희성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1817년(순조 17) 3월 2일(양력)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당시 사망한 다른 천주교인들의 유해와 함께 거두어져 무덤 4개로 나뉘어 안장되었으나, 그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는다.[『하느님의 종 125위 약전』]

성품과 일화

김희성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경상도 영양으로 이주한 후 금욕생활을 하며 나무뿌리와 도토리로 연명하는 등의 여러 가지 고신극기를 실천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인내의 모범을 보였다. 또한 1815년 자신을 체포하러 포졸들이 들이닥치자 아들에게 “이것은 하느님의 명이시니 나는 가야겠다. 그러나 너는 나를 따라오지 말고 남아서 가족들을 잘 보살피되, 특히 할머니를 잘 모시거라.” 하고 당부하고는 모친을 위로하였다. 그리고 부인에게 자녀들을 잘 가르친 뒤에 자신의 뒤를 따르도록 권고하였다. 또한 기쁜 낯으로 하산하며 포졸들은 물론 밀고자까지도 관대하게 대접하였다.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중]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2, 2006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하느님의 종 125위 약전』, 2009
  • http://www.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