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동(金壽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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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57년(세조 3)∼1512년(중종 7) = 56세]. 조선 중기 성종(成宗)~중종(中宗) 때의 문신이자 서예가. 영의정(領議政) 등을 지냈다. 자는 미수(眉叟)이고, 호는 만보당(晩保堂)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 첨지사(僉知事)김적(金磧)이고, 어머니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안질(安質)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중추부 동지사(同知事)를 지낸 김종숙(金宗淑)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이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좌의정김사형(金士衡)의 현손이자, 세조 때 좌의정김질(金礩)의 조카이기도 하다. 연산군(燕山君)의 신임을 받은 덕분에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많은 문신들을 구할 수 있었으며, <중종반정(中宗反正)>에도 참여하여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재치가 넘치고 청렴하였으나, 사림파로부터 연산군에게 충실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성종 시대 활동

1474년(성종 5)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18세였다. 3년이 지나 21세가 되던 1477년(성종 8)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방목(榜目)』 ]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권지(權知)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임명되었다. 그 뒤에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로 옮겨 승문원 정자(正字)를 겸임하였다. 그는 사대(事大)의 표문(表文)·주문(奏文)을 잘 썼기 때문에 종9품의 참하관(參下官)에서부터 정3품의 당상관(堂上官)에 오를 때까지 항상 승문원의 벼슬을 겸임하였다. 1479년(성종 10) 승정원 주서(注書)에 임명되었다가 군기시(軍器寺) 주부(主簿)로 옮겼다. 이어 승륙(陞六)하여 사헌부 감찰(監察)에 임명되었다가, 예조 좌랑(佐郞)과 호조 좌랑을 거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사서(司書)가 되었다. 또 홍문관 부수찬(副修撰)과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승진하였으며, 이후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역임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13년 6월 3일),(『성종실록』 14년 11월 10일),(『성종실록』 15년 11월 30일),(『성종실록』 17년 3월 2일)

1488년(성종 19) 홍문관 교리(校理)에 임명되었다가, 1489년(성종 20) 이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었다.(『성종실록』 19년 7월 24일) 의정부에 들어가서는 의정부 검상(檢詳)과 의정부 사인(舍人)으로 차례대로 승진하였다. 1491년(성종 21) 가을 할머니의 상(喪)을 당하여 1년 간 상중에 있다가, 상기를 끝마치고 사도시(司䆃寺) 첨정(僉正)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 장령(掌令)을 거쳐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으로 옮겼다.(『성종실록』 24년 10월 8일)

연산군 시대 활동

1495년(연산군 1) 명(明)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새 임금을 책봉(冊封)하였다.(『연산군일기』 1년 6월 3일) 조정에서 예전부터 내려오는 관례에는 중국 명나라 사신이 우리나라에 도착하면, 문례관(問禮官)이 명나라 사신에게 반드시 조칙(詔勅)을 반포하고 영접하는 의례를 상세히 물은 후 그에 따른 접대를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문례관과 명나라 사신 사이에 문답이 오갈 때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 많았으므로, 전고(典故)에 밝고 예의를 잘 아는 자를 문례관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김수동이 문례관에 임명되어 의주(義州)로 가서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였다.(『연산군일기』 1년 5월 25일) 이어 김수동은 그해 여름 홍문관 전한(典翰)에 임명되었다가 1496년(연산군 2)에는에는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이 되었으며, 이어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으로 승진하였다.(『연산군일기』 1년 6월 26일),(『연산군일기』 2년 7월 5일),(『연산군일기』 2년 9월 14일)

1497년(연산군 3) 봄 승정원 동부승지로 발탁되었다가 여러 차례 승진을 거쳐 승정원 좌승지(左承旨)가 되어 연산군의 측근으로서 신임을 받았다.(『연산군일기』 3년 2월 20일),(『연산군일기』 4년 2월 19일),(『연산군일기』 5년 1월 11일) 1498년(연산군 4) 유자광(柳子光)에 의하여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과 관련된 죄인을 심문할 때 승지김수동이 연산군에게 변명하여 많은 사림파(士林派) 관리들을 구원하였다. 가을에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나갔다가 겨울에 계모(繼母)의 병 때문에 사임하였으나, 예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어 춘추관(春秋館) 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였다.(『연산군일기』 4년 7월 2일),(『연산군일기』 4년 11월 9일) 이듬해인 1499년(연산군 5)에는 성절사(聖節使)로 임명되어 명나라 북경(北京)에 가서 황제의 생신을 하례하고 돌아왔으며, 이어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다.(『연산군일기』 5년 9월 4일),(『연산군일기』 6년 6월 4일)

1500년(연산군 6) 중추부 동지사에 임명되었고, 1501년(연산군 7) 형조 참판을 거쳐 이조 참판으로 옮겼으며, 1502년(연산군 8)에는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었다.(『연산군일기』 7년 5월 12일),(『연산군일기』 8년 6월 16일) 1503년(연산군 9) 봄 특별히 형조 판서(判書)에 임명되어, 홍문관 제학(提學)을 겸임하였고, 가을에 이조 판서로서 의금부(義禁府) 지사(知事)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을 겸임하였다.(『연산군일기』 9년 3월 8일) 1504년(연산군 10) 여름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품(陞品)되었고, 겨울에는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품되었다.(『연산군일기』 10년 5월 6일) 이어 1505년(연산군 11) 가을 종1품상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품되고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에 임명되어 이조 판서를 겸임하였다.

이때 임사홍(任士洪)에 의하여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연산군의 생모 폐비윤씨(廢妃尹氏)를 폐출할 때 관련된 여러 문관(文官)들과 연산군에게 직언을 한 신구 대간(臺諫)들이 모조리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는데, 법망을 무사히 벗어나는 사람이 드물었다. 이런 가운데 김수동은 추핵관(推劾官)의 직위에서 되도록 너그럽게 판결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연산군에게 이들을 적극적으로 변론하였다. 그 결과 상당한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나중에 중종반정이 일어날 때 반정파가 그를 설득하여 반정에 가담하게 한 것도 이때 그가 살려준 사람들이 그 은혜를 갚으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1506년(연산군 12) 2월 계모의 상을 당하였다. 당시 연산군은 3년의 상례를 3개월로 단축한 ‘단상제(短喪制)’를 시행하고, 이를 어기는 자에게 중벌을 더하였으므로, 김수동도 이에 따라 5월에 상기를 끝마치고 도로 우찬성에 임명되었다. 후에 그가 당시의 ‘단상제’를 따르며 유교의 3년 상례를 지키지 못한 것이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어 그 해 7월 그는 우의정으로 승진하였는데, 얼마 후인 9월에 중종반정이 일어났다.(『연산군일기』 12년 7월 23일),(『연산군일기』 12년 7월 29일) 처음에 그는 성희안(成希顔)의 설득에 불응(不應)하였으나, 거듭된 설득에 결국 반정(反正)에 참여하였다.

중종 시대 활동

1506년(중종 1) 9월 박원종(朴元宗)이 성희안과 손을 잡고 유순정(柳順汀)을 끌어 들여 반정 세력을 규합하여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그 동생 중종(中宗)을 옹립하였다. 김수동도 성희안의 설득에 의하여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에 책훈되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봉해졌다.(『중종실록』 1년 9월 2일),(『중종실록』 1년 9월 3일),(『중종실록』 1년 9월 8일) 반정파(反正派)는 그를 좌의정에 임명하였으나, 그는 계모의 3년 상기(喪期)를 끝마치겠다며 이를 사양하였다. 그리고 중종의 허락을 받아 계모의 무덤에서 3년 동안 여묘살이 하면서 중앙 정계에서 떨어져서 조용하게 은거하였다. 그러나 사림파에서는 그가 기회를 엿보면서 늦게 사직하였다고 비난하였다. 이러한 사림파의 비난과는 달리 그는 계모가 살았을 때에는 친어머니처럼 잘 모셨고, 계모가 세상을 떠나자 정승의 몸으로 계모의 무덤에서 3년 동안 여묘살이 한 효자라고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1508년(중종 3) 여름 계모의 상기가 끝나자, 김수동은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고 경연청(經筵廳) 영사(領事)를 겸임하였다.(『중종실록』 3년 10월 29일) 1509년(중종 4)에는 문과의 전시(殿試)를 주관하여 김정국(金正國) 등 18인을 뽑았으며, 1510년(중종 5) 봄 영의정박원종이 세상을 떠나자, 영의정이 되어 홍문관 영사와 예문관 영사, 춘추관 영사를 겸임하였다.(『중종실록』 5년 3월 6일) 1512년(중종 7) 봄 병에 걸려 여러 달 동안 낫지 않으므로, 중종이 휴가를 주고 내의(內醫)를 보내어 치료하였을 뿐만 아니라 승지를 보내어 문병하기도 하였다.(『중종실록』 7년 3월 11일),(『중종실록』 7년 4월 20일) 또한 김수동이 오래 병을 앓아서 출사(出仕)하지 못하였다며 녹봉을 받지 않자, 중종이 특별히 녹봉을 주기도 하였다.(『중종실록』 7년 5월 28일),(『중종실록』 7년 6월 6일) 그해 7월 병이 위독해져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56세였다.(『중종실록』 7년 7월 7일)

한편 김수동은 글씨를 잘 썼는데, 특히 예서(隸書)에 능하였다.

성품과 일화

김수동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단정하고 무게가 있으며 지혜가 많았을 뿐 아니라, 행동이 단중(端重)하고 온아하였다. 젊어서부터 문명(文名)이 있었고 예서를 잘 썼으며, 또 정사에도 능숙하였다.(『중종실록』 7년 7월 7일) 그는 갓난아이 때부터 단정하고 온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석하고 영리하여 이미 뛰어난 기질이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5세 때 아버지마저 잃자 계모가 그를 키웠으므로, 계모를 평생 친어머니처럼 모셨다. 7세 때 글자를 배우다가 글귀를 엮어서 시를 지으니, 백부인 김질·김작(金碏) 등이 그의 빼어난 자질을 기특히 여겼다. 특히 큰아버지 김질은 그를 매우 귀하게 여기며, “이 아이는 세업(世業)을 실추시키지 않고, 장차 우리 가문을 다시 크게 일으킬 것이다” 라고 하였다.[비문]

1477년(성종 8) 21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예문관 주서에 임명되었을 때 어린 나이에도 직무를 아주 잘 수행하였다. 그때 승정원 승지채수(蔡壽)는 젊은 김수동의 단정한 모습과 진중한 태도를 보고 그를 몹시 아꼈다. 이에 채수는 자기의 아들 채소권(蔡紹權)의 아명(兒名)을 ‘수동(壽童)’이라고 지었다고 한다.[『해동악부』] 채수는 과거에 장원 급제하고 문장에도 뛰어나서 당대의 이름난 명사였다. 백부 김질·김작과 채수(蔡壽) 등이 천거하고 밀어주면서 김수동은 출세할 수 있었다.

김수동은 연산군 때에 우의정이 되었는데, 갑자사화 때 많은 문관들이 체포되어 거의 다 죽음을 당하는 가운데 그는 그 사이에서 주선하여 여러 사람의 목숨을 건졌다. 한편 당시 벼슬아치들은 앞을 다투어 집을 사치스럽게 꾸미고, 대문 밖에는 인사를 청탁하는 사람들이 바치는 뇌물 보따리가 저자를 방불하게 하였으나, 김수동은 청탁을 모두 거절하였기 때문에 대문 앞이 빗자루로 쓸어낸 것처럼 깨끗하였다. 그는 검약한 생활을 즐기고, 문장을 짓고 글씨를 쓰기를 좋아하였다.[『음애일기』]

박원종과 성희안이 반정을 하던 날, 연산군을 폐위하는 문제로 성희안이 우의정김수동의 집에 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참여하기를 설득하였다. 그러자 김수동은 “이러한 나라의 큰일에 대하여 내가 그 전말을 모르고 있는데, 갑자기 재상 한 사람이 와서 하는 말을 듣고, 내가 따라갈 수가 있겠는가” 하고, 자리를 편 후 베개를 베고 벌렁 드러누우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내 목을 잘라서 가라”고 하였다. 이에 성희안이 진성대군(晉城大君 : 중종)을 왕으로 세운다는 뜻을 슬그머니 비치자, 김수동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그렇다면, 내가 가야겠다”고 하였다.[『연려실기술』] 김수동은 성희안이 찾아와서 반정에 참여하라고 권유하였을 때, 함부로 자기 뜻을 굽혀서 따르지도 않았고, 조급히 굴지도 않고 조용히 살피며 헤아린 뒤에 행동하였던 것이다.[『음애일기』]

한편 사림파의 사관(史官)은 김수동을 다음과 같이 강도 깊게 비난하였다. “연산군 말년에 어머니의 상사를 당해서는 단상(短喪)하는 제도에 따라 상복을 벗고 길복(吉服)을 입고 벼슬을 하였다. 반정 뒤에도 안연(安然)히 조정에 나와 나라 일을 의논하고, 담소하기를 전과 같이하며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 없이 열흘이 되어도 관직을 사직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훈적(勳籍)에 참여하였으나, 자기 심촌 김무(金珷)와 아우 김수경(金壽卿)도 훈적에 올리도록 청하여 훈적에 기록된 다음에 비로소 사직을 청하였다. 대신들이 김수동의 뜻을 알아차리고 기복(起復)하기를 청하였으나, 유자광(柳子光)이 홀로 ‘전쟁을 하는 때도 아닌데, 기복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주장하자, 임금이 유자광의 의논을 따랐다. 이에 김수동이 부득이하여 물러갔다.”(『중종실록』 7년 7월 7일)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천현(陽川縣) 남쪽 장군소리(將軍所里)에 있는데, 신용개(申用漑)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

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군기시 판관(判官)이계희(李季禧)의 딸인데,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측실(側室)에서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김혼(金渾)은 훈음(勳蔭)으로 적자(嫡子)를 계승하여, 수의부위(修義副尉)·부사용(副司勇)에 임명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조선 후기와 달리 적서(嫡庶)의 구분이 엄격하지 않아서 공훈으로 서자가 적자가 될 수 있었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국조보감(國朝寶鑑)』
  • 『해동잡록(海東雜錄)』
  • 『동각잡기(東閣雜記)』
  • 『음애일기(陰崖日記)』
  • 『홍재전서(弘齋全書)』
  • 『해동악부(海東樂府)』
  • 『해동야언(海東野言)』
  • 『이요정집(二樂亭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