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행(金世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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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20년(광해군 12)∼1679년(숙종 5) = 60세.] 조선 중기 현종 때의 문신.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 등을 지냈다. 자는 건보(健甫)이다. 본관은 강릉(江陵)이고, 거주지는 서울과 강원도 강릉(江陵)이다. 아버지는 제용감(濟用監)봉사(奉事)김홍적(金弘績)이고, 어머니 강릉 최씨(江陵崔氏)는 최경진(崔慶振)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참봉(參奉)김호변(金虎變)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판관(判官)김준현(金峻賢)이다. 예조 참판(參判)김상적(金尙迪)의 조카이기도 하다.

효종~숙종 시대 활동

1658년(효종 9) 나이 39세 때에 음직(蔭職)으로 경릉(敬陵 : 세조의 아들 덕종의 왕릉) 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 1660년(현종 1)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41세였다. 관례대로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 김천찰방(金泉察訪)에 임명되었다. 내직(內職)으로는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과 예조 좌랑(佐郞), 병조 좌랑을 지냈고, 병조 정랑(正郞)을 두 번 지냈으며,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을 거쳐 사헌부 지평(持平)을 네 번 지냈다. 외직(外職)으로는 홍천현감(洪川縣監)·경성판관(鏡城判官)·거창현감(居昌縣監) 등을 지냈다.[『약천집(藥泉集)』 권21 「지평김군묘표(持平金君墓表)」]

1666년(현종 7) 암행어사가 홍천현감김세행의 치적이 뛰어나다고 임금에게 보고하니, 현종이 김세행에게 표리(表裏 : 옷의 겉감과 안찝) 1벌을 상으로 하사하기도 하였다.(『현종실록』 7년 11월 30일) 1667년(현종 8)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가, 1671년(현종 11)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는데, 1674년(현종 15)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동지사권대운(權大運)과 함께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을 다녀왔다.(『현종실록』 8년 6월 21일),(『현종실록』 11년 8월 18일),(『현종실록』 15년 7월 11일)

만년에 병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강릉으로 돌아왔음에도 대동찰방(大同察訪)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병을 치료하며 고향 강릉에서 은거하다가, 1679년(숙종 5) 병으로 강릉의 고향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0세였다.

성품과 일화

1671년(현종 12) 남구만(南九萬)이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서 함흥(咸興)의 감영(監營)에 있을 때 김세행이 경성판관에 임명되었는데, 함흥을 지나다가 감영에서 만나 서로 반가워하였다. 1679년(숙종 5) 남구만이 남인(南人)윤휴(尹鑴)를 탄핵하다가 강릉으로 귀양을 가게 되면서 두 사람이 다시 만나 해후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김세행이 죽은 지 11년이 지나, 1690년(숙종 16) 김세행의 아들인 사헌부 장령(掌令)김시휘(金始徽)가 영의정남구만에게 아버지 무덤 앞에 세울 표석(表石)의 음기(陰記)를 부탁하였던 것이다. 이에 남구만은 사양하지 않고 김세행의 묘갈문(墓碣文)을 지었다.[『약천집』 권21 「지평김군묘표」]

묘소와 후손

김세행의 묘소는 강원도 강릉부 서쪽 구산역(丘山驛) 남쪽 언덕에 있는데, 남구만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있다.

부인 강화 최씨(江華崔氏)는 통덕랑(通德郞)최지철(崔智徹)의 딸인데, 자녀는 1남을 낳았다. 부인 강릉 최씨는 남편보다 먼저 작고하였으며, 무덤은 강릉부 북쪽 용연리(龍淵里)에 있다. 외아들 김시휘(金始徽)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과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측실에서 낳은 아들로 김시태(金始台)·김시준(金始浚)·김시홍(金始洪)이 있다.[『약천집』 권21 「지평김군묘표」] 증손자는 사헌부 지평김경지(金敬之)이다.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약천집(藥泉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옥오재집(玉吾齋集)』
  • 『운평집(雲坪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