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경(桔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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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롱꽃과에 속하는 다년생 식용식물.

개설

조선시대에 도라지[桔梗]는 뿌리를 생으로 먹기도 했지만, 햇볕에 말려 두었다가 조리하여 식용하였다. 도라지는 재료 자체를 오래도록 저장할 수 있고 구하기도 쉬워서 일상음식, 제사나 잔치 때의 의례음식, 흉년 때의 구황식품으로 널리 쓰였고, 약재로도 이용되었다.

원산지 및 유통

도라지의 원산지는 한국, 중국, 일본 등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경기도의 삭공(朔貢)이고 경기도·충청도·전라도·강원도·황해도·평안도·함길도에서 나는 약재였다.

연원 및 용도

조선초기부터 도라지는 구황식품으로 중요시되었다. 도라지 자체를 가루 내어 구황식으로 먹기도 했지만, 구황장을 담그는 재료이기도 했다. 특히 세종은 백성들의 굶주림을 구제하기 위해 『경험진제방(經驗賑濟方)』에 나온 도라지가루 1숟갈, 잡채(雜菜) 1줌, 장(醬)과 소금 각각 1숟갈을 타서 달여 먹는 방법을 농사를 망친 각 도의 백성에게 두루 알리게 하였다(『세종실록』 18년 8월 25일). 이와 비슷한 흉년 구제책은 1447년(세종 29)에도 있었다. 호조 판서이견기(李堅基)가 물에 담갔다 말린 도라지를 굵게 가루 내어, 소금과 장 반 숟가락, 물 1사발을 섞어 죽을 끓여 먹으면 배고픔도 면할 수 있고 부종(浮腫)도 나지 않는다고 보고하자, 세종이 그 방법을 경기감사·강원감사·평안도감사에게 알리며 흉년을 구제할 만하면 두루 알리라고 하였다(『세종실록』 29년 2월 25일).

도라지가루로 죽을 쑤어 구황식을 만드는 법 이외에 도라지를 가루 내어 곡식가루와 섞거나 밥을 지을 때 얹어 쪄 먹는 방법이 『고사신서(攷事新書)』, 『농정회요(農政會要)』, 『치생요람(治生要覽)』 등에 실려 있다. 작황이 좋지 않은 해의 겨울 그리고 이듬해를 대비하기 위해 백성들이 제철에 도라지를 미리미리 가능한 한 많이 캐서 저장해 두도록 꾸준히 권장하였다(『세종실록』 27년 2월 3일)(『세조실록』 1년 7월 24일)(『성종실록』 12년 5월 19일)(『명종실록』 9년 7월 14일).

흉년이 들면 곡식이 부족한 것도 문제지만, 음식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장(醬)을 담그기 어려운 상황이 된다. 구황에서 소금과 장은 곡식 못지않게 긴요한 식품이었다.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서 지적하였듯이, 흉년에 장 종류가 없으면 초목이나 채소로 연명하다 반드시 병에 걸린다. 이에 『증보산림경제』, 『해동농서(海東農書)』, 『농정회요』에서 구황장 만드는 법[救荒醬法]을 『구황촬요(救荒撮要)』와 『고사촬요(攷事撮要)』에 있는 내용을 인용하여 소개하였다. 이 구황장법 가운데에 도라지와 더덕을 재료로 한 만드는 법이 포함되어 있다.

도라지는 여러 가지 음식의 재료로도 이용되었다. 조선시대 유서류 및 조리서 등만 보아도 도라지를 주재료로 한 도라지찜, 도라지나물[桔梗菜], 도라지생채, 도라지좌반, 도라지정과의 제법이 보인다. 그 밖에 도라지는 열구자탕, 즉 신선로와 전골, 각색 화양적의 재료로 쓰였다. 이런 음식들은 일상에서 반찬으로도 먹지만, 궁중의 잔칫상이나 다례상에 제수로 오르기도 했다.

한편 도라지는 약원에서 순조에게 올렸던 길경지각탕(桔梗枳殼湯)에서처럼 약재로도 쓰였다(『순조실록』 14년 10월 30일)(『순조실록』 14년 11월 1일).

참고문헌

  • 『고사신서(攷事新書)』
  • 『농정회요(農政會要)』
  •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 『치생요람(治生要覽)』
  • 『해동농서海東農書』
  • 장준근, 『몸에 좋은 산야초』, 넥서스, 200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