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묘(箕子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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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기자 조선의 시조인 기자(箕子)의 묘.

개설

기자의 묘는 고려시대부터 평양성 북쪽 토산(兎山)에 있다고 알려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초기부터 국가의 보호를 받았다. 1788년(정조 12)에 편찬된 『춘관통고(春官通考)』에 따르면, 묘의 주변은 곡장으로 둘렀고, 묘 앞쪽에는 문인석과 무인석 각 1쌍 및 양석(羊石) 2개가 배치되어 있었다. 또 5칸의 정자각과 표석도 건립되어 있었다. 고종대에는 ‘기자릉’으로 승격되었으며, 그 제향이 국가 사전(祀典)에 포함되었다.

조성 경위

기자는 이름이 서여(胥餘)이며, 고대 중국 상(商)나라의 28대 왕 문정(文丁)의 아들이다. 기(箕)나라에 봉해졌기 때문에 기자라고 부른다. 상나라가 망하자 기자는 유민을 이끌고 북쪽으로 이주했다고 하는데, 조선으로 들어와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다스렸다고도 한다. 이런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은 복생(伏生)의 『상서대전(尙書大傳)』에서부터 『사기(史記)』, 『한서(漢書)』 등 후대의 역사서에 이르기까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또한 『구당서(舊唐書)』에는, 고구려에서는 영성신(靈星神), 일신(日神) 등과 함께 기자신(箕子神)을 섬긴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이미 기자에 대한 존숭이 시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사』 「예지(禮志)」에 따르면 1102년(고려 숙종 7) 10월에, 나라의 교화가 기자로부터 비롯되었으므로 그 묘를 찾아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자는 예부(禮部)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를 시행했다고 한다. 또 『고려사』「지리지(地理志)」 서경 유수관 조에는, 기자묘가 평양성의 북쪽 토산 위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고려시대에는 국가에서 기자의 묘에 관심을 가졌으며,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종과 세종대에 기자묘를 보수하고 석수(石獸)를 설치하였으며, 정자각을 건립하였다. 그뿐 아니라 묘지기 1호(戶)를 두어 묘를 돌보도록 하였다. 그러나 국가 사전(祀典)에 포함된 기자의 제사는 묘가 아니라 그의 사당에서 거행하였다. 기자의 사당은 평양성 내 의리방에 있었는데, 조선시대 전기에는 기자묘(箕子廟), 기자사(箕子祠)라고 하였으나 1612년(광해군 4)에 숭인전(崇仁殿)으로 이름을 고쳤다. 기자묘는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훼손되었으나, 명나라 군사의 관심을 받았으며, 난리가 평정된 뒤 조정에서는 이전보다 더 관심을 기울였다.

변천

정조대에는 기자묘를 능으로 승격할 것을 청하는 평안도 유생의 상소가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고종대인 1889년(고종 26)에 능으로 추봉되었으며, 그 제향이 사전에 포함되어 한식에 국가에서 능제(陵祭)를 지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제향일이 청명으로 바뀌었다. 1906년(광무 10)에서 1907년(융희 1) 사이에는 능의 석물과 정자각을 개수하는 공사를 하였다.

관련 사항

평양에는 기자릉 외에도 기자의 사당인 숭인전, 기자를 받드는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라는 기자정(箕子井), 기자가 평양 외성 남쪽에서 대동 강변에 이르는 지역에 설치했다는 정전(井田) 등 기자와 연관된 유적지가 많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역사적 진실과는 무관하게 유교 문화를 일찍부터 수용한 문화 국가임을 자처한 조선시대 시대적 상황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吉禮小祀·雜祀」『춘관통고(春官通考)』「吉禮·崇仁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