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회(耆老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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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시대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베풀던 연회.

개설

기로회(耆老會)는 고려 때는 주로 관직에서 은퇴한 선비들의 모임을 의미하였고, 조선으로 들어와서는 기로소에 들어간 신하들을 위한 연회, 즉 기로연의 뜻으로 쓰였다. 고려시대에 행해졌던 기로회는 국가가 지원해 주는 공식적인 모임이 아닌 사적 모임의 성격이 강하였으나, 조선시대에는 나이가 많은 임금이나 관직에서 물러난 70세가 넘는 정2품 이상의 문관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마련한 기로소의 모임, 또는 연회를 기로회라고 하였다.

연원 및 변천

기로회는 중국의 당나라와 송나라 때부터 있었다. 송나라에서는 이를 기영회(耆英會)라고 하였는데, 대표적으로 낙양에서 문언박(文彦博)·부필(富弼)·사마광(司馬光) 등 나이가 많은 자 13명이 모여서 술을 마시면서 서로 즐긴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를 들 수 있다.

고려 때의 기로회는 1200년 전후에 수태위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로 치사(致仕)한 최당(崔讜)을 중심으로 최선(崔詵)·장백목(張白牧)·고형중(高瑩中)·이준창(李俊昌)·조통(趙通)·백광신(白光臣)·이세장(李世長)·현덕수(玄德秀) 등이 만든 모임에서 비롯되었으며, 이후에도 관직에서 물러난 선비들이 만든 모임을 지칭할 때 이 말을 썼다.

『동국이상국집』 제36권에는, 고려의 개국공신 유금필(庾黔弼)의 5세손 유녹숭(庾祿崇)이 1213년(고려 강종 2) 은청광록대부상서좌복야로 치사하고 집에 있게 된 후, 당시 경상(卿相)으로 실직(實職)한 사람들과 기로회를 만들어서 때때로 술자리를 만들어 마음껏 즐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경우 1402년(태종 2) 4월 17일 서원부원군이거이(李居易)가 기로회를 베푸니 왕이 술을 내려주었다고 하였는데, 이때의 기로회는 ‘노인들을 위한 연회’라는 의미로 쓰였다. 기로소는 1394년(태조 3)에 창설되고, 1400년 태종이 즉위하면서 제도화되어 전함재추소라고 하였다가 1428년(세종 10) 기로소로 개칭되었다. 기로소 안에 있는 누각인 영수각(靈壽閣)에는 기로들의 초상을 걸어 두었으며, 기로들에게는 전토(田土)와 노비 등이 하사되었다. 기로회는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열리지 못하였다가 현종 이후에 재개되었다.

절차 및 내용

심수경(沈守慶)이 찬한 『견한잡록』에 의하면,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훈련원이나 반송정(盤松亭)에서 기로소의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1456년(세조 2) 3월 3일에는 보제원(普濟院)에서 기로소의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술과 음악을 하사하였다(『세조실록』 2년 3월 3일). 당시 세조는 승지박원형(朴元亨)에게, "기구대신(耆舊大臣)들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지금 연회를 베푸는 때에 별도의 하사가 있어야겠다."면서 사복시에서 사냥한 짐승을 하사하고 박원형을 시켜 하유(下諭)하게 하였는데, 기로회에 승지를 보내는 관행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견한잡록』의 1592년과 1594년의 기록을 통해 당시 서울 아현 일대에 있었던 퇴직 노인들의 모임인 기로회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 마을에 기로회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아이현 아래에 사는 노인들의 모임으로 경진년(1580년) 가을부터 모임을 시작하였으며, 임진년(1592년) 여름에 난리를 만나 중지되었다. 모임은 매월 각 집에서 돌아가며 가져 한 번 돌면 다시 시작하는데, 활도 쏘고 혹은 작은 표적의 활도 쏘며 바둑도 두고 혹은 시를 지어 매우 즐겁게 지냈다. 처음에는 20명이던 것이 끝에는 9명만 남았다. 영주감사이의경(李義卿)은 90세이고, 동지송찬(宋贊)은 82세이며, 영해감사이지경(李智卿)은 80세다. 판중추부사인 나 심수경은 77세이며, 전 직장성학령(成鶴齡)은 76세이고, 전 직장심수약(沈守約)은 73세다. 첨정남전(南銓)은 73세이며, 전 응패두(鷹牌頭)심수의(沈守毅)는 72세이고, 주부심수준(沈守毅)은 69세다."

참고문헌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 『견한잡록(遣閑雜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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