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산성(金烏山城)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경상도 선산부금오산에 설치된 산성.

개설

금오산성(金烏山城)은 경상도의 요충지에 위치한 관방시설로 금오산성(金鰲山城) 혹은 금오산성(金吾山城)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 말에는 인근 고을에서 백성들이 왜구를 피해 들어갔던 기록이 전한다. 처음에는 산 정상에 성을 축조했으나, 인조대에 이르러 외성을 축조하여 보강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경상도의 적과 대치하는 장소이자, 백성들이 들어가 몸을 피하는 입보처(立保處)로 기능했다. 숙종대에 한 차례 개축되고, 영조대에는 산성 독진(山城獨鎭)이 되었다. 고종대에 마지막으로 개축된 이후 오늘날에 전하고 있다.

위치 및 용도

금오산성은 김천과 구미, 칠곡 등에 걸쳐 있는 해발고도 976m의 금오산(金烏山)에 축조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선산부에 속하였는데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동쪽으로 군위까지 50리(약 19.6㎞), 서쪽으로 개령까지 20리(약 7.8㎞), 남쪽으로 인동까지 40리(약 15.7㎞), 북쪽으로는 상주까지 35리(약 13.7㎞) 거리에 있었다.

금오산성은 경상도의 요충지에 해당하는 곳에 위치한 주요 관방시설이었다. 고려 말 왜구들로부터 인근 고을 백성들의 입보처로 사용된 이래로 개축과 증축을 거듭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때에는 도체찰사이원익이 일시적으로 머물기도 했다.

변천 및 현황

금오산성은 고려시대에 축조되었다. 그 구체적인 시기는 확인되지 않지만, 고려 말에 왜구의 약탈을 피해 선산·안동·개령·성주 등의 많은 주민을 징발하여 산성을 수비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때 성안에는 군기와 군량을 보관하는 창고인 군창(軍倉)이 있었다.

금오산성은 조선 태종대에 본격적으로 수축되었다. 1410년(태종 10)에 경상도와 전라도 여러 읍의 산성을 수축하게 했는데, 이는 왜구를 방어하고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태종실록』 10년 2월 29일). 1450년(세종 32) 1월 양성지가 올린 변란을 대비하는 방책 가운데 경상도는 대마도의 요충이라고 언급하고 ‘성주에 금오산성이 있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태조대의 축성 사업이 완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세종실록』 32년 1월 15일). 또 금오산 석성(石城)의 현황은 『세종실록』「지리지」에 자세히 나타나는데 험한 지형에 축조되었으면서도 많은 인민을 수용할 수 있고 물을 조달할 연못이나 샘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금오산성은 규모가 비교적 큰 산성으로 선산·개령·약목 등의 인민이 입보할 계획이었다[『세종실록』지리지 상주목 선산도호부].

금오산성은 임진왜란기에 다시 수축되는 계기를 맞았다. 임진왜란 발발 직후 비교적 손쉽게 경상도 일대를 내어준 조선은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를 아울러 이르는 하삼도의 산성을 개축하고 이에 의거하여 방어전선을 구축할 필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군비 강화를 위하여 조총 등의 화기를 제작하고, 포수를 양성하며 명과 일본의 전술을 배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빠른 시간 안에 쉽게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었고, 일본군의 재침 위협이 고조됨에 따라 산성 논의가 의욕적으로 진행되었다.

1595년(선조 28) 8월 선조는 비망기를 내려 산성을 중심으로 하는 청야(淸野) 전략을 수립하도록 지시했다. 청야는 적의 침입이 있을 때 주민들을 성안으로 들여보내고 들을 비워서 보급로를 차단하는 전략이었다. 비변사에서는 양곡을 확보하고 전란을 피할 방책으로 산성의 축조에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당시 성주(星州)의 용기산성(龍起山城)과 삼가(三嘉: 현 경상도 합천)의 악견산성(岳堅山城), 단성(丹城)의 동성산성(東城山城) 등은 수축을 마친 상태였고, 유사시에 입보하기 위해 군량을 저축하여 방어책을 어느 정도 수립하고 있었다. 금오산성은 인동의 천생산성(天生山城)과 함께 큰 진으로 만들자는 논의를 하였고, 이를 위해 백면서생인 선산부사김윤국(金潤國) 대신 배설(裵楔)에게 이를 위임하도록 했다(『선조실록』 28년 8월 5일). 배설은 당시 경상도 지역의 축성에 많이 기여한 인물로 이때 선산부사로서 금오산성의 건설을 주관했다.

한편 1595년(선조 28) 도체찰사로 임명된 우의정이원익은 선산의 금오산성에 체찰사의 근무처인 체부(體府)를 개설하였다. 강화협상에 문제가 생기면서 일본군의 재침에 대한 우려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원익은 1596년(선조 29) 11월에 금오산성에 들어가 지킬 뜻을 밝혔다. 금오산성이 중시된 것은 천생산성과 좌우측으로 마주 보고 있으면서 낙동강을 끼고 있어 방어가 용이했고, 이화령(伊火嶺)과 추풍령(秋風嶺) 방면으로 충청도로 올라오는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금오산성은 경상도의 산성을 가운데에서 통할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선조실록』 29년 11월 16일). 이런 까닭에 이원익은 금오산성의 수축을 담당했던 배설을 수성장(守城將)으로 삼아 굳게 지키도록 했다(『선조실록』 29년 11월 17일).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발발하여 일본군이 북상하자 이원익은 다시 금오산성에 들어가 지켰다(『선조실록』 30년 8월 12일). 이는 도체찰사이원익이 성주에 체찰사의 본영을 설치하고 유사시에는 금오산성을 활용하였음을 잘 보여준다.

금오산성은 성으로서의 전략적인 가치가 높았으므로 왜란 이후에도 계속해서 중시되었다. 1606년(선조 39) 선산의 수성장정방준(鄭邦俊)에 의해 한 차례 개축이 이루어졌다. 병자호란 이후 하삼도의 산성을 개축하자는 논의가 있었을 때 금오산성도 포함되었다. 1639년(인조 17)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는 이명웅(李命雄)은 인조에게 하직하면서 금오산성을 경상도의 믿을 만한 세 개의 성 가운데 하나로 지목했다. 이에 인조는 성을 개축할 만한 장소를 확인하여 보고하도록 지시했다(『인조실록』 17년 4월 4일). 당시 경상도의 산성으로 주목된 것은 금오산성과 천생산성, 어류산성(御留山城)이었다. 조사 결과 어류산성은 새로 수축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고, 금오산성 등은 비교적 유지가 잘 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해 비변사에서는 천생산성은 형세가 좋지만 수원(水源)이 부족하여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했다(『인조실록』 17년 6월 19일). 이후 어류산성은 부분적인 개축을 하는 데 그쳤다. 여러 여건을 조사한 결과 금오산성이 매우 중요한 관방으로 이해되기에 이르렀다. 경상도의 성지를 돌아본 이명웅은 속오군(束伍軍)을 동원하여 금오산성을 개축하겠다고 보고하여 인조의 재가를 받았다(『인조실록』 17년 7월 13일).

금오산성의 축조는 선산부사이각(李恪)에게 맡겨졌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이때의 역사는 외성(外城)의 축조에 집중되었다고 한다. 외성은 둘레가 4,135자(약 1253m), 높이가 14자(약 4.2m)에 이르는 큰 규모였으나 이때의 역사는 비교적 빠른 시일 안에 완료되었다. 선산부사이각은 역사를 주관한 공로를 인정받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벼슬이 올랐다(『인조실록』 17년 9월 28일).

1675년(숙종 1)에 선산부가 독립 진이 되면서 금오진(金烏鎭)이 되었다. 금오산성에는 별도로 3품 무관을 별장으로 두었고 그는 선산부사의 중군(中軍)을 겸하게 되었다. 이로써 금오산성에는 한 명의 별장, 각각 다섯 명씩의 진리(鎭吏)와 지인(知印), 열 명의 사령(使令)이 설치되었고, 보군(步軍) 2,296명을 두고 각각 한 명씩의 보인(保人)을 지급하였다. 금오진의 군병은 1728년(영조 4)에 발생한 ‘무신란(戊申亂)’ 때 동원되기도 했다(『영조실록』 4년 4월 1일). 금오산성은 금오진의 설치로 인해 비교적 잘 관리된 상태로 유지될 수 있었다.

금오산성은 고종대에 다시 수리되었다. 1868년(고종 5) 11월 경상우도암행어사이용직(李容直)이 올린 장계의 별단에는 금오산성의 성첩(城堞), 즉 성가퀴와 관청 건물의 수리를 마쳤다고 하며, 수리 후에 남은 돈 2,200냥으로 벼 1,000석(石)과 소금 200석을 구매하여 군창에 보관하여 두었다(『고종실록』 5년 11월 5일). 이 사실은 현재 산 정상에 남아 있는 금오산성 중수송공비(重修頌功碑)를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이때 수축한 형태가 지금까지 내려오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행정 주소는 경상북도 구미시 금오산로(433-3)이며, 1986년 12월 11일에 경상북도기념물 제67호로 지정되었다.

형태

금오산성은 내성과 외성을 갖춘 이중의 산성이다. 고려 말에 축조된 것은 산 정상을 둘러싼 테뫼식 산성이었다. 1410년(태종 10)에 경상도와 전라도의 산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하는 사업이 벌어졌을 때, 한 차례 정비를 보았다. 이때 축조된 금오산성은 선산의 부치(府治)에서 남쪽으로 45여 리(약 17.7㎞)에 있었는데, 매우 높고 험하였으며 천연 암반으로 이루어진 부분이 많은 천혜의 요새였다. 당시에는 돌로 둘레 1,440보(약 1.8㎞)의 성을 쌓고, 성안에 군창을 두어 개령(開寧: 현 경상도 김천)·약목(若木: 현 경상도 칠곡)의 물건을 보관하기도 했다. 금오산성은 산 정상에 수축되었지만 세 개의 연못과 한 개의 시내, 네 개의 샘을 가지고 있어 물이 풍부하였다[『세종실록』 지리지 상주목 선산도호부].

인조대에 북쪽을 향해 나 있는 계곡을 따라 포곡식의 외성(外城)을 신축함에 따라 기존의 산성은 내성(內城)이 되어 서로 연결되었다. 이로써 금오산성은 2.7㎞의 내성과 3.5㎞ 이상의 외성을 갖춘 대규모의 산성이 되었다.

내성에는 대장문(大楊門)인 남문과 건성문(建成門)인 서문이 있고, 외성으로 이어지는 중문이 있었다. 문의 너비는 남문이 1.8m, 서문은 1.7m, 중문은 2m로 비교적 작은데 각 문은 좌·우측에 방어 시설을 별도로 두어 보강하였다. 남문 안에는 군수품 보관 창고인 군기고(軍器庫)가 있었고, 서문 안에는 격대(擊臺) 두 개가 설치되었다. 또 남서쪽의 산등성이에는 좌·우측에 약 450m와 300m 길이의 철성(凸城)을 축조하여 방어력을 높였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성벽의 높이는 약 7자(약 2.1m)이었다.

외성에는 계곡 쪽에 북쪽으로 난 대혜문(大惠門)과, 그 반대편에 암문이 있다. 본래 외성의 출입문에는 6칸의 문루가 있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암문은 너비 1.2m, 높이 1.1m의 특이한 양식을 보여준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성벽의 높이는 약 14자(약 4.2m)에 달했다. 성벽 위에는 너비 1.3m 규모의 낮게 쌓은 성벽인 여장(女墻)이 있고 25×35㎝ 크기의 활쏘기 구멍인 사혈(射穴)이 밖을 향해 경사지게 뚫려 있다.

성안에는 해운사(海雲寺)·만승사(萬勝寺)·진남사(鎭南寺) 등의 사찰이 있으며 여러 곳에 건물지가 남아 있다.

참고문헌

  • 『대동지지(大東地志)』
  • 『만기요람(萬機要覽)』
  • 『축성금오시일기(築城金烏時日記)』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황부연, 「조선후기 산성 수축과 운영의 재정구조」, 충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 이건형, 「금오산성과 천생산성의 연구」, 『대구교육대학교논문집』12, 대구교육대학교, 1977.
  • 임세권·송승규, 「금오산성 내의 역사유적 조사보고」, 『안동사학』1, 안동사학회, 1994.
  • 장필기, 「임진왜란 직후 축성역 동원체계의 한 형태 : 금오산성 수성장 정방준의 축성일기를 중심으로」, 『고문서연구』25, 한국고문서학회, 2004.
  • 차용걸, 「조선후기 관방시설의 변화과정」, 『한국사론』9, 국사편찬위원회, 198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