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사(金山寺)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고려시대 법상종의 중심지였으며, 임진왜란 때 호남 의승병의 주요 거점이었던 사찰.

개설

금산사(金山寺)는 백제 법왕대에 창건되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백제 유민을 포섭하기 위해 700년경에 의적(義寂)을 파견하여 금산사에 머물도록 하였다고도 한다. 8세기에는 진표(眞表) 율사(律師)가 주석하며 유식학(唯識學)과 미륵 신앙을 유포시켰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호남 의승병의 주요 거점으로서 뇌묵처영(雷默處英)이 활동하였다. 조선후기에는 1,400여 명이 모인 화엄법회가 열리기도 했으며, 승려의 잘못을 규찰하는 전라우도의 도규정소(道糾正所)가 있었다.

내용 및 특징

(1) 삼국~통일신라시대

금산사는 백제 법왕(法王) 즉위년인 599년에 창건되었다. 1635년에 중관철면(中觀鐵面)이 편찬한 『금산사사적(金山寺事蹟)』에 의하면, "백제 법왕 즉위년에 살생을 금지하는 법을 반포하고, 그 이듬해에 금산사를 개창하여 승려 38명을 출가시켰다."고 전한다.

백제 멸망 후 700년을 전후하여 유식학에 뛰어났던 의적(義寂)이 금산사에 주석하였다고 전해지지만 명확한 근거는 없다. 의적은 당나라에서 유식학을 배우고 귀국한 후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의적의 금산사 주석에 대해 신라의 백제 유민 포섭 정책의 일환으로 신라 조정에서 의적을 금산사에 파견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8세기에는 진표(眞表) 율사가 금산사에 주석하였다. 진표는 12세 때 금산사에 들어가 순제(順濟) 법사에게 가서 출가하고, 그 후 전국 명산을 두루 다니다가 미륵과 지장, 두 보살로부터 계법을 전해 받고 다시 금산사로 돌아와 중창 불사를 시작하였다. 이와 관련해 다음의 설화가 전한다.

진표는 변산반도의 부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가 미륵상 앞에서 수행하였으나 3년이 지나도록 깨달음의 수기(受記)를 받지 못하자 실망한 나머지 바위 아래로 몸을 던졌다. 이때 청의동자(靑衣童子)가 나타나 손으로 받아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다시 뜻을 발하여 삼칠일을 기약하고 부지런히 참회하였다. 3일째가 되자 손과 발이 부러져 떨어져나갔다. 7일째 밤에 지장보살이 금장(金杖)을 흔들며 나타나더니 손과 발을 고쳐주고 가사와 발우를 주었으므로 더욱더 열심히 정진하였다. 21일을 채우자 천안이 열리며 도솔천 무리들이 내려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때 지장보살로부터 『보살계본(菩薩戒本)』을 받고, 미륵보살로부터 『점찰경(占察經)』과 나무 간자(簡子)를 받았다. 그리고 다시 금산사로 돌아와 중창 불사를 시작하였다.

진표는 금산사에서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에 의거하여 점찰법(占察法)을 시행한다. 점찰법은 189개의 간자로 과거·현재·미래의 삼세 중에 받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차별을 점치는 것인데, 삼세의 과보 가운데 주된 관심사가 되는 것은 미래세이다. 이 때문에 참회 수행에서 궁극적으로 희구하는 신앙의 대상은 미륵이 되었다. 또 『점찰선악업보경』에 설해진 보살계는 미륵이 설하였다고 하는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에 의거한 계율이다. 그러므로 진표의 계율과 교법은 유식학을 가르침으로 하는 법상종(法相宗)에 속하였다. 이 때문에 법상종 사찰이었던 금산사에서는 미륵불을 주존으로 모셨다.

(2) 후삼국~고려시대

신라말 후삼국으로 갈라져 치열하게 패권을 다투던 와중에 후백제 왕 견훤(甄萱)이 935년에 아들 신검(神劍)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당했다. 그러나 견훤은 금산사를 몰래 빠져나가 고려 태조인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이후 고려가 삼국을 통일하였다.

고려시대 금산사의 역사는 전기의 혜덕(慧德) 왕사(王師) 소현(韶顯)과 후기의 원명(圓明) 대사(大師) 해원(海圓)으로 대표된다. 먼저 소현은 1079년(고려 문종 33)에 금산사 주지로 부임하면서 사찰을 크게 중창하였다. 이때 조성된 것이 현존하는 석조물인 5층석탑(보물 제25호), 방등계단(보물 제26호), 석련대(보물 제23호), 노주(보물 제22호) 등이다. 그는 1083년(고려 순종 1)에 법상종의 승통(僧統)이 되었고 말년에 금산사에서 입적하였다. 다음으로 해원(海圓)은 12살 때 금산사의 승려 석굉(釋宏)에게 출가하였다. 그는 1294년(고려 충렬왕 20)에 승과(僧科)에 합격하였고, 그의 철저한 계행(戒行)이 알려져 1305년(고려 충렬왕 31)에 원나라 안서왕(安西王)아난달(阿難達)의 초청을 받아 원나라 수도 연경(燕京)에 갔다. 1328년(고려 충숙왕 15)에 귀국하여 금산사에 머물며 중창하였다.

(3) 조선시대

조선시대는 유학을 숭상하는 나라였으므로 고려시대까지 이루어지던 사찰에 대한 지원을 점차 줄여나갔는데, 1405년(태종 5)에 금산사 주지 도징(道澄)과 진주와룡사(臥龍寺) 주지 설연(雪然)이 여자 종[婢]과 간통한 사건을 계기로, 각 사찰의 노비를 속공(屬公)시키고, 여자 종이 절 안에서 입역하는 일을 금지시켰다(『태종실록』 5년 11월 21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조헌(趙憲)은 박정로(朴廷老)와 함께 금산사 누각에 올랐는데, 붉은 기운 세 가닥이 하늘 북쪽에 뻗치고 서남쪽으로 반쯤 뻗쳐 있는 것을 보고 일본군이 쳐들어올 것을 예견하기도 하였다[『선조수정실록』 25년 8월 1일 12째기사].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산사는 호남 의승병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뇌묵처영(雷默處英)은 금산사에서 출가했고, 서산 대사 휴정(休靜)에게 불법을 배웠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산사를 중심으로 1,000여명의 승병을 모아 전투에 참가하였다(『선조수정실록』 25년 7월 1일). 그 공으로 선조(宣祖)는 처영에게 법호(法號)를 하사했다. 하지만 정유재란에서는 80여 동의 전각과 산내 암자가 왜군에 의해 전소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1601년(선조 34)부터 35년간에 걸쳐 승려 수문(守文)이 주도하여 금산사를 중창하였다.

조선후기 금산사는 화엄법회(華嚴法會)의 도량이었다. 1725년(영조 1)에 환성지안(喚惺志安)이 1,400여명의 대중이 운집한 가운데 화엄법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누군가가 환성지안이 역도의 우두머리라고 무고(誣告)하였고, 결국 체포되어 제주도로 유배 가서 입적하였다.

그리고 금산사는 도규정소(道糾正所)가 있는 사찰이었다. 조선후기에는 국가 공인의 불교 종단이 없었던 대신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있던 봉은사(奉恩寺)와 봉선사(奉先寺), 그리고 도총섭이 있던 남한산성 개원사(開元寺)·북한산성 중흥사(重興寺)·수원 용주사(龍珠寺)에 전국 승려의 과실을 규찰하는 오규정소(五糾正所)가 있었다. 봉은사는 강원도의 사찰, 봉선사는 함경도의 사찰, 개원사는 충청·경상도의 사찰, 중흥사는 황해·평안도의 사찰, 용주사는 전라도 사찰 승려의 규정을 담당하였다. 경기도는 오규정소의 합동 구역으로서 나누지 않고, 수락산 흥국사(興國寺)와 안현산 봉원사(奉元寺)에서 규정(糾正)의 일을 보좌하였다. 또한 각 도에는 도규정소(道糾正所)가 있어서 오규정소를 보좌하였는데, 경상도는 칠곡 천주사(天柱寺), 전라좌도는 순천 송광사(松廣寺), 전라우도는 금산사(金山寺)에 도규정총섭(道糾正摠攝)이 있었다.

참고문헌

  • 『삼국유사(三國遺事)』
  • 『금산사사적(金山寺事蹟)』
  • 금산사지 간행위원회, 『미륵도량 모악산 금산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본사 금산사, 2005.
  • 김남윤·이응묵·소재구, 『금산사』, 빛깔있는 책들, 대원사, 2000.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박광연, 「의적의 법화경집험기 편찬 배경과 특징」, 『역사와 현실』, 한국역사연구회, 2007.

관계망